항목 ID | GC0020009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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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晉熙 |
영어음역 | Kim Jinhui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북도 청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박홍갑 |
[정의]
조선 후기의 충신.
[가계]
본관은 김해(金海)이며, 자는 겸숙(兼叔)이다. 공조참판 김자항(金字恒)의 아들이다. 상신(相臣) 김우항(金宇杭)의 서질(庶姪)이다. 할아버지는 김홍경(金洪慶)이고, 증조할아버지는 김덕승(金德承)이다.
[활동사항]
서울에서 살다가 청주 상당산성 아래로 이사하였다. 어머니에게 효도를 다하였고, 체력이 남달리 뛰어나 남대문루를 뛰어넘었다 한다.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의 난(일명 무신란)이 일어나 목사 박당(朴鏜)은 도피하고 우후(虞侯) 박종원(朴宗元)은 성을 내주고 투항하니 역도의 무리들이 청주를 쉽게 점령해 버렸다. 이에 앞서 김진희(金晉熙)는 우후 박종원을 만나 성을 지킬 것을 권유하였으나, 그 뜻이 흔들리는 것을 알았다.
이리하여 그는 80노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창의할 것을 결심한 후 주교(州校)로서 낮 익은 이진우(李鎭遇), 조중렴(趙重廉)과 약속하고 의병을 모집하였다. 청주성에 도착하여 역도의 무리를 유인하고 위협하니 내응자들이 성문을 쉽게 열어 주었다. 이에 술에 취한 이인좌의 부하 신천영(申天永)을 찾아 목베고, 이인좌의 동생 이기좌(李麒佐)를 사로잡아 적당을 소탕하였다.
그 때 마침 노모가 위급하다는 보고를 받고 향인(鄕人) 박민웅(朴敏雄)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어머니에게 달려갔다. 그때의 일로 논공(論功)에서 제외된 채 나머지 12장(將)만이 녹훈되었는데, 1788년(정조 12)에 빠진 자를 다시 포상할 때 시호와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한다.
『영조실록(英祖實錄)』에는 영조 5년에 일제히 포상할 때에 전 별장(別將) 김진희에게 미포(米包)를 내렸다는 기사가 있고, 『정조실록(正祖實錄)』에도 박민웅에 가려 포상이 안 된 점을 지적하고 있다.
시호는 충헌(忠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