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0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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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歷史-把守-放鶴洞銀杏- |
이칭/별칭 | 연산군 묘역 은행나무 |
분야 | 지리/동식물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546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숙영 |
소재지 | 방학동 은행나무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546[위도: 37.660754 (37° 39' 38.71'' N), 경도: 127.022794 (127° 1' 22.06'' 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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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 | 서울특별시 기념물|노거수 |
[서울특별시 보호수 제1호]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546번지 서울 연산군 묘 앞에는 연산군 묘만큼이나 유명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서울특별시 보호수 제1호로 지정[1968년 2월 26일]된 은행나무가 그것이다. 서북쪽으로 원당 샘이라는 유서 깊은 샘물을 낀 채, 북쪽의 서울 연산군 묘로부터 남쪽의 신동아 아파트 단지까지 그윽이 굽어보면서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긴 듯한 노거수(老巨樹)이다.
나무 높이 25m, 가슴 높이 둘레 10.7m에 달하는 장대한 위용을 자랑한다. 가지의 자람도 아주 좋아서 수형(樹形)이 아름답고 분위기가 신령스럽기까지 하다. 조선을 거쳐 일제 강점기, 해방, 6·25 전쟁과 개발 경제 시대의 구호 소리를 거쳐 지금에 이르는 역사,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지켜 본 증인이자 파수꾼이다. 방학동 은행나무 앞에 서면 그래서 숙연해진다.
[아들딸 점지해 주는 나무]
“신령한 은행나무님, 젖이 잘 나와 아이 키우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보살펴 주십시오.”
어느 봄날이었다. 허름한 옷차림을 한 젊은 여인이 초저녁 어스름에 은행나무 앞에서 손바닥을 싹싹 비비며 치성을 드렸다. 여인은 근처 마을에 사는 아낙으로 세 번째 아이를 출산하였는데 젖이 잘 나오지 않자 이곳을 찾은 것이다.
다음 날 새벽이었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아 어둑어둑한 은행나무 앞에 또 다른 젊은 여인이 나타났다. 여인은 은행나무 앞에 엎드려 몇 번인지 모를 만큼 수많은 절을 하면서 눈물까지 흘리고 있었다.
“나무님, 은행나무님. 제게도 아들 하나만 점지해 주십시오.”
이상한 일이었다. 당시 풍습으로 이 같은 치성은 대게 절을 찾아가 법당에 엎드려 비는 것이 보통이었는데, 이 여인들은 왜 은행나무를 찾아와 빌었을까?
800을 헤아린다는 나이 외에도 이 방학동 은행나무에는 무언가 특별한 것이 있다. 나무줄기에서 옆으로 살짝 뻗어 위로 올라간 큰 가지 아래로, 어찌 보면 여인의 젖꼭지 같기도 하고 남성의 성기 같기도 한 유주(乳柱)가 신기한 모양으로 돌출되어 있다. 유주를 단 방학동 은행나무에 치성을 드리면 산모는 젖이 잘 돌고 자식을 낳지 못한 여인은 아들딸을 낳을 수 있다고 대대로 믿어 왔다는 것이 마을 노인들의 전언이다. 그래서 소문을 들은 여인들이 무시로 찾아와 치성을 드리곤 하였다.
삼각산 자락 인근에 사는 여인은 혼인한 지 10여 년 동안 세 명의 딸을 낳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해 시어머니에게 모진 구박을 당하고 있었다.
“삼대독자 집안에 시집왔으면 대를 이어야지 장차 이 일을 어찌할 것이냐. 만약 내년까지 아들을 낳지 못하면 보따리 싸 들고 친정으로 돌아가든지 씨받이를 보게 될 터이니 그리 알아라”
시어머니의 최후통첩이었다. 너무나 가혹하였지만 거역할 수도 없는 일이어서 여인은 결국 영험하다는 방학동 은행나무를 어두운 새벽마다 홀로 찾았다. 은행나무를 찾은 지 3개월째, 이날 새벽은 짙은 안개가 끼어 더욱 스산하였지만 여인은 절박한 마음으로 은행나무 앞에 무릎을 꿇었다. 뜨거운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며 한참을 빌고 있을 때이었다.
“정성이 참으로 갸륵하구나. 네 모습이 내 어머니를 많이 닮았구나. 아들을 낳도록 해 줄 터이니 이제 그만 일어나 돌아가거라.”
여인은 꿈결처럼 들려오는 굵은 남자의 목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고개를 뒤로 돌렸더니, 이게 웬일인가. 조금 뒤쪽 왕의 무덤이 있는 곳 앞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이 아닌가. 그것도 보통 사람이 아니었다. 화려한 금관을 쓰고 곤룡포를 입은 귀인(貴人)의 모습이었다. 여인은 놀랍고 반가워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다가 얼굴을 들어 귀인을 바라보았으나 그 귀인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이었다.
여인은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집으로 돌아갔다. 그런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태기를 느꼈고, 열 달 후 여인은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았다. 여인에 대한 소문은 곧 가까운 이웃 동네에까지 퍼졌다. 은행나무가 죽은 왕 무덤 옆에 있어 영험이 두 배로 강하다는 말도 덧붙었다. 여인의 소원을 들어 준 귀인은 혹 은행나무의 신령이 된 연산군은 아니었을까.
[은행나무제(祭)]
신령스러운 나무라서 그랬을까? 예부터 나라에 큰 변이 있을 때마다 방학동 은행나무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불이 났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하기 1년 전인 1978년에도 화재가 났다. 나무의 영험은 경외를 낳는다. 영물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사람들은 방학동 은행나무의 영험한 힘을 믿고 기리며 해마다 정월 대보름이 되면 나무에 제사를 지내 오고 있다. 이 원당골에 오래전부터 깃들어 살아온 파평 윤씨(坡平尹氏) 집안이 주축이 되어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그러나 1960년대부터 산업화가 진행되고 더불어 새마을 운동이 옛것에 메스를 들이대면서 맥이 끊겼다. 이 제사 풍습은 1990년대 말이 되어 되살아났다. 그러나 이제는 영물에 대한 제사의 성격을 버리고 경로잔치를 겸한 동네잔치 성격으로 틀을 바꾸었다. 젖이 나오지 않으면 우유로 대신하고, 아들을 낳기 위해 치성을 드리기보다 산부인과를 찾는 오늘날의 세태에서 더 이상 은행나무는 영물로 대접받기 힘들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그 옛날 원당골 터주대감으로 버티고 있으면서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묶었던 신목답게 은행나무가 오늘날에도 방학동 사람들을 결속시키는 역할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도시 개발과 은행나무]
수나무인 방학동 은행나무의 동남쪽 200m 지점에는 원래 은행나무가 한 그루 더 있었다고 한다. 먼저 간 이 암나무까지를 일러 ‘부부 은행나무’라 불렀다. 두 나무는 몇 백 년을 서로 마주보며 사랑을 속삭여 왔다. 그렇게 정답던 암나무는 1990년대 초 인근의 신동아 아파트 건립 당시 벌목되고 말았다. 보존 가치보다 개발 가치를 더 높게 치던 어두운 시절이었다. 하지만 암나무가 쓰러지기 전 맺은 열매들은 이 땅 어딘가에서 멋진 아들딸 나무로 자라고 있으리라고 생각된다.
암나무를 잃은 수나무는 1990년대 초부터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였다. 홀로 남은 외로움 뿐만 아니라 나무의 왼편에 들어선 신동아 아파트와 오른편 빌라에 막혀 뿌리와 가지를 제대로 뻗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동네 주민들이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1995년에 ‘은행나무의 주변 환경을 개선해 달라’는 민원을 제기하였다. 마을 근처에서 수백 년 이상 자라온 신물(神物)을 우리 대(代)에 망가뜨린다는 것은 수치가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2007년 도봉구에서는 약 40억 원을 들여 주변 빌라 한 동을 철거하여 은행나무의 최소한의 생육 공간을 확보하였다. 그리고 지지대를 만들어 힘없는 가지를 군데군데 받치는 한편, 병충해로 썩어 들어간 부분을 잘라 내는 외과 수술을 네 차례나 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생육 상태를 확보할 수 있었다.
산림청에서는 나무의 생육 상태를 따져 ‘매우 양호, 양호, 보통, 불량, 매우 불량’의 5가지로 분류한다. 방학동 은행나무는 최고령 할아버지임에도 건강 상태가 좋은 편이어서 현재 ‘양호’ 등급을 부여받았다. 그 덕분에 시민들은 푸른 나무 그늘을 만들어 주는 은행나무 밑에서 수백 년 동안 이어져 온 전설을 들으며 마음의 안녕을 얻고 있다.
[나무,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로 거듭나다]
기존에 관리되고 있었던 서울특별시 보호수 목록에는 방학동 은행나무의 추정 수령이 880년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하기 위하여 국립 산림 과학원의 과학적 수령 조사 방법을 적용한 결과 약 550년[±50]으로 측정되었다. 이 결과도 천연기념물 및 서울특별시 지정 문화재로 지정된 수목과 비교하면 최고령 그룹에 속하는 것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서울특별시 소재 수목 중에서도 최고령에 해당하는 천연기념물 제59호 ‘서울 문묘 은행나무’[수령 702년] 다음으로 오래되었다.
이에 서울특별시는 2013년 3월 28일자로 방학동 은행나무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33호로 재지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서울특별시는 지정 이유에 대해 “이 은행나무는 조선 전기에 식재된 나무로 수령이 오래되어 지역의 역사를 상징적으로 보여 주며, 수형 또한 아름다워 문화재적 가치가 크므로 서울특별시 기념물로 지정·보존할 필요가 있다. 또한 수목의 생육 환경의 보호를 위해 보호 구역을 지정하여 보존하고자 한다”라고 발표하였다. 진실 되고 착하고 아름다운 것은 가만히 있어도 그 본성을 만천하에 저절로 드러낸다는 것을 보여 주는 드문 사례가 ‘방학동 은행나무’가 아닐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