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0512 |
---|---|
한자 | 成渾 |
이칭/별칭 | 호원(浩原),우계(牛溪),묵암(默庵),문간(文簡)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이민아 |
출생 시기/일시 | 1535년 - 성혼 생 |
---|---|
활동 시기/일시 | 1583년 - 성혼 이조참의 제수 |
몰년 시기/일시 | 1598년 - 성혼 졸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02년 - 성혼 관직 삭탈 |
추모 시기/일시 | 1633년 - 성혼 좌의정에 추증, 문간(文簡) 시호 받음 |
추모 시기/일시 | 1681년 - 성혼 문묘에 배향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1689년 - 성혼 문묘에서 출향(黜享) |
추모 시기/일시 | 1694년 - 성혼 문묘에 재배향 |
출생지 | 성혼 출생지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 |
부임|활동지 | 성혼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404 |
묘소|단소 | 성혼 묘소 -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 산8-2 |
사당|배향지 | 죽림 서원 - 충청남도 논산시 강경읍 황산리 |
사당|배향지 | 물계 서원 - 경상남도 창녕군 대지면 모산리 |
사당|배향지 | 소현 서원 - 황해남도 벽성군 석담리 |
사당|배향지 | 운전 서원 - 함경남도 함주군 운전면 차인리 |
사당|배향지 | 파산 서원 - 경기도 파주시 파평면 눌노리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창녕(昌寧) |
대표 관직 | 좌참찬 |
[정의]
조선 전기 도봉 서원에 출입하였던 문신.
[가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우계(牛溪)·묵암(默庵). 증조할아버지는 현령 성충달(成忠達)이며, 할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성세순(成世純)이다. 아버지는 조광조(趙光祖)의 제자이자 예산 현감을 지낸 성수침(成守琛)이며, 어머니는 판관 윤사원(尹士元)의 딸인 파평 윤씨(坡平尹氏)이다. 부인은 신여량(申汝樑)의 딸인 고령 신씨(高靈申氏)이다.
[활동 사항]
성혼(成渾)[1535~1598]은 17세에 생원·진사 초시에 합격하였으나 과거에 뜻이 없어 복시(覆試)를 보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였다. 사헌부 장령, 이조참의를 제수 받았으나 사양하고, 1583년(선조 16) 다시 이조참의에 임명되었으나 곧 사임하고 경연(經筵)을 맡았다. 이어 이조참판에 임명되었지만 5차에 걸쳐 사직 상소를 올려서 끝내 사임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우참찬으로서 광해군을 호종하고 다니다가 선조에게 용병(用兵)과 군량(軍糧) 등 3책을 논하였다. 1594년(선조 27) 명나라 총독 고양겸(顧養謙)이 일본과 화의를 권유하자 좌참찬으로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같이 화의를 주장하였으나 선조가 반대파의 의견을 들어 배척하였다. 화의를 주장한 전라 감사 이정암(李廷庵)을 용서해 줄 것을 청하였다가 선조가 분노하자 고향 파주로 내려갔다.
[학문과 저술]
성혼은 도봉 서원의 기문(記文)을 지은 이이(李珥)와 교분이 두터웠으며, 도봉 서원에 자주 출입하였다. 당시 이이는 이황(李滉)과 성리학의 이기설(理氣說)에 대해 논쟁 중이었다. 이황은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 즉 이(理)와 기(氣)가 뗄 수 없는 상호관계에 의하여 발동된다는 입장인 데 반하여, 이이는 기발이승 일도설(氣發理乘一途說)로 기가 발동해야 이가 기를 타고 작용한다는 입장이었다. 성혼은 수차례에 걸쳐 이이와 토론하면서 이황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성혼의 사단칠정 이기설(四端七情理氣說)은 새로운 경지의 학설로서, 조헌(趙憲)·황신(黃愼) 등 많은 제자를 양성하였다. 저서로는 『우계집(牛溪集)』, 『주문지결(朱門旨訣)』, 『위학지방(爲學之方)』 등이 있다.
[묘소]
묘는 경기도 파주시 파주읍 향양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신도비가 경기도 파주시 묘소 입구에 있는데, 비문은 김상헌(金尙憲)이 짓고 김집(金集)이 썼으며 전액(篆額)은 김상용(金尙容)이 썼다. 1602년(선조 35) 기축옥사(己丑獄事)와 관련하여 관직이 삭탈되었다가, 1633년(인조 11) 관작이 회복되면서 좌의정에 추증되고,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숙종 15) 출향(黜享)되었다가 1694년(숙종 20) 다시 배향되었다. 여산의 죽림 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 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 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 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 서원(坡山書院)에 제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