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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4900514
한자 金壽恒
이칭/별칭 구지(久之),문곡(文谷),문충(文忠)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서울특별시 도봉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민아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629년연표보기 - 김수항 생
활동 시기/일시 1646년 - 김수항 진사시 장원
몰년 시기/일시 1689년연표보기 - 김수항 졸
추모 시기/일시 1694년 - 김수항 신원, 복권
추모 시기/일시 1725년 - 김수항에게 문충(文忠) 시호 받음
추모 시기/일시 1886년 - 김수항 현종 묘정 배향
부임|활동지 김수항 활동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지도보기
묘소|단소 김수항 묘소 -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
사당|배향지 녹동 서원 - 전라남도 영암군
사당|배향지 석실 서원 - 경기도 남양주시
사당|배향지 옥병 서원 -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 산210
성격 문신
성별
본관 안동(安東)
대표 관직 영의정

[정의]

조선 후기 도봉 서원에 출입하였던 문신.

[가계]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구지(久之), 호는 문곡(文谷). 할아버지는 서인 산림계가 이념적 지주로 받들던 김상헌(金尙憲)이고, 아버지는 동지중추부사 김광찬(金光燦)이다. 어머니는 목사 김래(金琜)의 딸이자 인목 대비의 아버지인 김제남(金悌男)의 손녀이다. 형은 김수증(金壽增)김수흥(金壽興)이고, 아들은 김창집(金昌集)김창협(金昌協)이다.

[활동 사항]

김수항(金壽恒)[1629~1689]은 18세에 진사시에서 장원하고, 23세에 알성 문과 장원으로 관직에 발을 들여놓았다. 35세에 이조판서를, 40세에 정승을 지내는 등 빠른 승진을 거듭하였다. 1660년(현종 1) 왕의 특명으로 예조판서에 오르고, 이후 이조판서로 재직하며 서인 인사들을 조정에 선임하는 데 힘썼다. 또한 송시열(宋時烈) 등 산림(山林)[학식과 덕이 높으나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선비]이 직접 조정에 나와 활동하지 않을 때에도 조정에서 이들의 입장을 대변하였고, 이들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적극 구원하는 상소를 올리곤 하였다. 1670년(현종 11) 우의정으로 발탁된 이후 송시열을 비난하는 상소가 있으면 이를 적극 저지하고 옹호함으로써 송시열의 목소리를 충실히 반영하는 데 앞장섰다.

갑인 예송(甲寅禮訟) 때 전라남도 영암군으로 유배를 갔다가 경신출척((庚申黜陟)으로 정승에 올랐다. 이후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송시열과 함께 죽기 전까지 약 8년간 재상으로 활동하면서 남인을 배척하고, 송시열박세채(朴世采) 등을 불러들여 서인의 정치적 위상을 강화하는 데 앞장섰다.

[학문과 저술]

어릴 때 가학(家學)을 이은 김수항송시열의 학문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이기론(理氣論)의 경우 뚜렷하게 자기주장을 밝히는 경우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러나 주자(朱子)의 법대로 모든 일을 수행할 것을 권하다든가, 군주에게 수양을 권할 때 ‘군주 성학(君主聖學)’을 강조함으로써 서인계 산림 일반의 주장에 동조하였다. 김수항송시열의 『주자대전차의(朱子大全箚疑)』 편찬에도 참여하였으나, 관직에 있는 관계로 큰 역할을 하지는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송시열김수항에게 심정적 지지를 기대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것은 당시 그 문하에서 김수항의 위치와 역할을 간접적으로 확인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도봉 서원조광조(趙光祖)를 배향하고, 서인의 태두인 율곡(栗谷) 이이(李珥)가 기문을 쓴 서원으로 특히 서인계 학자들이 많이 드나들었다. 김수항 역시 도봉 서원을 출입하였으며, 도봉 서원의 학자들과 교유한 흔적은 문집에 남아 있는 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도봉 서원 앞에 새겨진 ‘고산앙지(高山仰止)’라는 글씨는 세간에 김수항이 새겼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김수항의 형인 김수증의 글씨로 밝혀졌다. 김수항의 문집인 『문곡집(文谷集)』은 아들인 김창집김창협이 주도하여 유고(遺稿)를 정리한 후, 김수항 사후 10년이 되는 1699년(숙종 25)에 간행되었다.

[묘소]

묘는 경기도 남양주시 이패동에 있으며, 정경부인 안정 나씨(安定羅氏)와 합장묘이다.

[상훈과 추모]

사사된 지 5년 만인 1694년(숙종 20) 신원, 복권되었다. 이후 전라남도 영암군의 녹동 서원(鹿洞書院), 경기도 남양주시 석실 서원(石室書院), 경기도 포천시의 옥병 서원(玉屛書院)에 차례로 배향되었다. 1725년(영조 1) ‘문충(文忠)’이라는 시호를 내려 받았고, 1868년(고종 23) 현종의 묘정에 추배(追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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