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5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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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流頭 |
이칭/별칭 | 소두,수두,물맞이 |
분야 | 생활·민속/민속 |
유형 | 의례/평생 의례와 세시 풍속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집필자 | 육민수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지역에서 음력 6월 15일에 지내던 명절.
[개설]
유두 는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의하면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약자로,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한다는 뜻이다. 이를 소두(梳頭), 수두(水頭), 물맞이 등이라고도 한다. 동류수(東流水)가 양기가 왕성한 물이라고 생각하여 유둣날에 이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함으로써 부정한 것을 씻어 버리고자 하였다. 또 유두에는 햇과일로 차례를 지내고 음식을 차려 먹는 행사를 하기도 하였다.
[연원 및 변천]
유두 풍속은 신라 때부터 고려, 조선까지 면면히 전승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고려사(高麗史)』,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 『목은집(牧隱集)』, 김극기(金克己)[1379~1463]의 문집, 세시기 등에 소개되어 있다.
우선 유두 풍속이 신라 때부터 있었음은 김극기의 문집에 “경주 풍속에, 6월 보름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아 불길한 것을 씻어 버린다. 그리고 계음(禊飮)을 유두연(流頭宴)이라 한다.”라는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고려 시대에는 『고려사』 명종 15년(1185) 6월조에 왕이 시어사(侍御史) 및 환관 최동수(崔東秀)와 함께 광진사(廣眞寺)에서 유두음(流頭飮) 놀이를 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당시 풍속에 “6월 15일에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서 머리를 감음으로써 좋지 못한 일을 제거하고 또 거기에 모여 앉아 술을 마셨는데, 이것을 유두음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조선 시대 규방 가사인 「사친가」에도 “유월이라 유두일에 … 홍로유금(紅爐流金) 되었으니 나체노발(裸體露髮) 못 견디네.”라는 표현에서 유두 풍속을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유두는 거의 잊힌 풍속이 되었는데 물맞이 정도의 의미가 여름휴가로 변용되어 전할 뿐이다.
[절차]
1993년 서울특별시에서 간행한 『서울 민속 대관』의 「놀이의 실상 일람」에는 도봉구 번 2동에 5대째 거주하는 주민 윤수환[남, 66]에게서 채록한 유두에 대한 내용이 실려 있다.
유두 에는 밀가루에 호박을 썰어 넣고 밀전병을 부쳐 먹었으며, 먹기 전 집안의 성주신이나 조왕신에게 바치며 고사를 올리기도 하였다고 한다.
[생활 민속적 관련 사항]
유둣날 도봉구에서는 동쪽으로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고 목욕을 함으로써 부정한 것을 씻어 버리고 여름의 무더위를 이겨내려고 하였다. 또 유두에 약수에서 머리를 감으면 부스럼을 앓지 않는다고 여겼다. 산이나 계곡에서 탁족을 하며 더위를 식히기도 했는데, 이러한 풍속의 기저에는 몸과 마음을 깨끗한 물로 정화한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이처럼 유두는 물과 관련된 명절이기 때문에 폭포 아래에서 쏟아지는 물을 맞는 등 물맞이 행사가 주로 행해졌다.
또한 유두 무렵에는 햇과일이 나오는 때이기 때문에 참외나 수박 같은 과일과 함께 국수, 밀전병 등을 조상에게 올리는 유두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새로 난 것을 바친다는 의미에서 유두천신(流頭薦新)이라고도 한다. 한편 노구메를 드리는 행사도 있었는데, 이는 놋쇠로 만든 노구솥에 밥을 지어 올리며 기원하는 풍속이다. 또 유두에는 멥쌀가루를 쪄서 구슬같이 만든 다음, 그것을 꿀물에 넣어 먹는 수단을 만들어 먹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