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68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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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泰壹居住地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 195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명찬 |
조성|건립 시기/일시 | 1966년 - 전태일 현재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 195번지에 가건물을 짓고 생활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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훼손 시기/일시 | 1985년 - 전태일 거주지였던 현재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 195가 쌍문동 삼익 세라믹 아파트로 재개발됨 |
현 소재지 | 전태일 거주지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 195[도봉구 쌍문동 56] |
성격 | 거주지 |
관련 인물 | 전태일(全泰壹)[1948~1970]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 해등로에 있는 전태일이 생애 마지막으로 거주한 곳.
[개설]
전태일(全泰壹)[1948~1970]은 1948년 대구에서 가난한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났다. 16세가 되던 1964년 동대문 평화 시장에 ‘시다’, 즉 미싱사 보조로 취직하여 열악한 작업 환경 속에서 꼬박 3년을 보내고 재단사가 되었다. 전태일은 고단한 노동 환경을 개선할 필요성을 절감하고, 「근로 기준법」에 대해 공부하는 한편, 뜻을 같이하는 사람들을 모아 평화 시장 종업원들의 근로 조건 개선에 관한 진정서를 만들어 여러 차례 해당 관청에 보냈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당한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1970년 11월 13일 「근로 기준법」 화형식과 함께 마침내 분신자살을 감행하였다.
[건립 경위]
집단 묘지 자리이었던 서울특별시 도봉구 쌍문동 208번지 일대에 1960년대 중반부터 지방 이주민들이 몰려들어 무허가 판자촌을 형성한 것으로 보인다. 전태일 가족도 1966년경 이곳으로 들어와 시멘트 블록으로 약 19.83㎡[6평]의 단칸방을 짓고 생활하였다. 블록집이라고는 하지만 철거반원들과의 실랑이로 블록이 부서질 것을 염려하여 블록 사이를 시멘트로 이어붙이지 않고 그냥 쌓아 두었다가 철거반원들이 닥치면 해체하고 간 뒤에 다시 쌓기를 반복하였다고 한다.
[위치]
전태일 거주지(全泰壹居住地)는 당시 서울특별시 성북구 쌍문동 208번지이며, 현재 도봉구 해등로 195[도봉구 쌍문동 56번지]로 쌍문 삼익 세라믹 아파트 112동 자리이다. 당시에는 이곳 전태일의 거주지를 ‘창동집’이라 불렀다고 한다. 창동에서 버스를 내려 한참을 걸어 야트막한 산 하나를 넘어야 208번지에 이를 수 있었다는 전언이고 보면 당시 주거 수준이 얼마나 열악하였을지 짐작이 간다.
[현황]
1985년의 재개발로 당시 무허가 판잣집은 모두 철거되고 현재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있다. 현재 이 아파트에 전태일의 동생 전태삼 가족이 거주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전태일의 사후에 그의 집은 한국 민주화 운동과 노동 운동의 산실로서 ‘사랑방’ 구실을 착실히 하였다. 어머니 이소선을 비롯하여 동생 전태삼 등이 여전히 거주하여 활동가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이 없어진 지금도 이 일대가 전태일의 삶과 함께 뭇 언론에 오르내리는 형편이고 보면, 이 일대가 지닌 역사적 상징성은 자못 준열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