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69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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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北漢道峯山遊記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 |
유형 | 작품/문학 작품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구본현 |
저자 생년 시기/일시 | 1729년 - 「북한도봉산유기」 저자 이엽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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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술|창작|발표 시기/일시 | 1779년 - 「북한도봉산유기」 창작 |
저자 몰년 시기/일시 | 1788년 - 「북한도봉산유기」 저자 이엽 사망 |
배경 지역 | 도봉산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
배경 지역 | 북한산 - 서울특별시 성북구 정릉동 |
성격 | 기문 |
작가 | 이엽 |
[정의]
1779년 이엽이 북한산과 도봉산을 유람하고 그 여정을 적은 기문.
[개설]
「북한도봉산유기(北漢道峯山遊記)」는 1779년(정조 3) 4월 15일 농은(農隱) 이엽(李燁)[1729~1788]이 사간(司諫) 기언정(奇彦鼎)[1716~?], 정언(正言) 유광천(柳匡天)[1732~?]과 함께 3일 간의 일정으로 북한산과 도봉산을 돌아보고 나서 쓴 유기문(遊記文)이다. 「북한도봉산유기」는 이엽의 시문집 『농은집(農隱集)』 권5에 수록되어 있다.
대략적인 여정은 다음과 같다. 첫날에는 가마를 타고 창의문(彰義門)을 나서 진관사(津觀寺)에서 쉬다가 저녁에 중흥사(中興寺)에서 묵었다. 이튿날 동장대(東將臺)에 올랐다가 동문(東門)을 나서서 수락 서계(水落西溪)를 보고 도봉원(道峯院)에서 묵었다. 3일째 되는 날 혜화문(惠化門)으로 들어와 송현(松峴) 집으로 돌아왔다. 한편 이 유람에 동행한 유광천 역시 이때의 유람을 기록한 「유삼각산기(遊三角山記)」라는 기문을 남긴 바 있다.
이엽의 자는 시회(時晦), 호는 농은, 본관은 전의(全義)이다. 1777년(정조 1)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문장 재행(文章才行)으로 이름이 높았다. 특히 『주역(周易)』에 조예가 깊었으며, 목민 후생(牧民厚生)의 실학사상에도 관심이 있었다. 벼슬은 공조 정랑에 이르렀으며, 저서로 『농은집』이 전한다.
[구성]
서언(序言)으로 전체 여정을 간략히 서술한 후 한북문(漢北門)→ 진관사→ 북한 중성문(北漢重城門)→ 산영루(山暎樓)→ 중흥사→ 행궁(行宮)→ 동장대→ 대동문(大東門)→ 수락 서계→ 청절사(淸節祠)→ 도봉(道峯) 등과 같은 순서로 표제를 붙여 여정에 따라 목격한 경관을 서술하고 있다.
[내용]
1. 서언
「북한도봉산유기」는 기해년(1779년) 4월 15일 기사일(己巳日)에 사간 기국진(奇國鎭)[‘국진(國鎭)’은 기언정의 자], 정언 유군필(柳君弼)[‘군필(君弼)’은 유광천의 자]과 함께 떠난 3일 간의 삼각산, 도봉산 유람의 여정을 간략하게 기술하는 것으로 시작하고 있다. 첫날인 15일에는 수레를 타고 창의문을 나와 낮에 진관사에서 쉬고, 저녁엔 북한산 중흥사에서 묵었다고 했다. 둘째 날인 16일 경오일(庚午日)에는 동장대에 올랐다가 동문으로 나와 수락산(水落山) 서쪽 계곡을 두루 보고 해질녘 도봉원, 즉 도봉 서원(道峯書院)에서 묵었다고 했다. 마지막 날인 17일 신미일(辛未日)에는 혜화문을 통해 송현 집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3일 간 승지(勝地)를 유람하면서 시를 몇 수 남겼는데, 문(文) 또한 빠뜨릴 수 없어서 스스로 본 광경을 추기(追記)하여 뒷날 산에 놀러 가는 자들이 장고(掌故)[관습으로 굳어짐]로 삼도록 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고 했다. 이어 삼각산에서 도봉산에 이르기까지 여정에 따라 각각 한북문→ 진관사→ 북한 중성문→ 산영루→ 중흥사→ 행궁→ 동장대→ 대동문→ 수락 서계→ 청절사→ 도봉 등의 순서대로 표제를 붙이고 각 지역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2. 한북문~중흥사
‘한북문’조에서는 ‘한북문’이라는 이름의 유래에 대해 언급하고, 문루에 있는 임금의 사언시(四言詩)를 인용하고 있다. 이어 연융대(練戎臺)와 세검정(洗劍亭)에 대해 언급하고는 가을에 이곳을 다시 찾기로 동행인들과 기약하고 시를 남겼다고 했다.
‘진관사’조에서는 진관사의 위치와 경개에 대해 서술하고, 진관사 동쪽의 석벽에 판각되어 있는 시에 차운하였다고 했다.
‘북한 중성문’조에서는 성을 겹으로 쌓은 연유에 대해 언급하고, 성 안의 그림 같은 풍경에 대해 감탄하는 내용을 서술하고 있다.
‘산영루’조에서는 북한 중성문을 지나 있는 산영루의 이름의 뜻에 대해 언급하고, 누각 위에 적혀 있는 “위석층성리 고루난폭중(危石層城裏 高樓亂瀑中)[위태로운 돌이 층층이 쌓인 성 속에 높은 누각이 어지러운 폭포 가운데 있네].”이라는 시구가 진경(眞境)을 그려낸 것이라 한 구절도 고치기 어렵다고 감탄하고 있다.
‘중흥사’조에서는 산영루 이후 길이 점차 험준하고 가파르다 하고, 경치 좋은 곳을 골라 옷을 벗고 발을 씻으며 한유(韓愈)의 “당류적족답간석(當流赤足踏澗石)[흐르는 물에 맨발 담그고 시내의 돌 밟네].”이라는 구절을 읊었다고 했다. 그러고는 각각 칠언 율시를 짓고, 저녁에는 중흥사에 머물게 된 여정을 적고 있다. 중흥사에 머무는 동안 생김새가 예스럽고 괴상한 그곳의 승려가 찾아왔는데, 말하는 것이 자못 조리가 있어 들을 만했다고 하였다. 또 산나물 등을 반찬으로 밥을 먹고 밤이 되어 달빛 아래를 걸었는데, 고목 사이로 달빛이 내리는 광경을 보고는 소식(蘇軾)의 “적수공명 조행교류(積水空明 藻荇交流)[쌓인 물에 달빛이 밝고, 물풀은 이리저리 떠다니네].”라는 구절을 들어 자신이 소식 뒤에 태어나 소식이 먼저 그러한 시구를 차지한 것이 한스럽다고 했다.
3. 행궁~동장대
‘행궁’조에서는 행궁이 중흥사에서 동쪽으로 몇 리쯤 올라가면 있다고 하여 그 위치를 먼저 언급하고, 말에서 내려 전문(殿門)으로 들어가 살핀 그곳의 형세에 대해 말하고 있다. 행궁은 봉우리가 높고 계곡이 좁은 북한산 가운데서도 조금 넓게 트인 곳에 위치하고 있다고 하고, 행궁 앞에 궁해(宮廨) 4, 5구와 시골집 수십 호가 산에 의지해 마을을 이루고 있으며, 집집마다 아름다운 꽃들을 섞어 심어 문득 번화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또 이번 행차에서 복사꽃 피는 때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고 있다.
‘동장대’조에서는 동장대의 형세와 삼각산에 대해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다. 동장대는 동쪽 산꼭대기에 있어 그곳에 오르면 산중의 형세를 다 볼 수 있다고 하고, 북쪽 너머로 세 봉우리, 즉 가장 높은 백운대(白雲臺)와 동쪽의 인수봉(印綬峯), 남쪽의 만경대(萬景臺)가 솥발처럼 서 있어서 ‘삼각산’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여 삼각산의 이름의 유래를 설명하고 있다. 그러고는 백운대와 인수봉, 만경대의 형세에 대해 자세히 언급하고 있다. 백운대는 험하고 높아 형세가 매우 위태롭고 웅장한데 몸이 가벼운 이는 암벽을 더위잡고 기어 올라갈 수 있지만 자칫 미끄러지면 천 길 절벽으로 떨어질 수 있다 하였다. 그곳에 오를지라도 달리 볼 것이 없는데, 이는 마치 여산(廬山) 속에 들어가면 여산의 진면목을 볼 수 없는 것과 같다고 하며 “여산의 진면목을 알지 못함은 다만 몸이 이 산 가운데 있기 때문이다.”라고 한 소식의 시 「제서림벽(題西林壁)」의 “불식여산진면목 지연신재차산중(不識廬山眞面目 只緣身在此山中)”이라는 구절을 인용하고 있다.
만경대에 대해서는 높이가 백운대 보다 낮고 산꼭대기가 평평하여 앉을 만하다 하였고, 백운대 서쪽의 노적봉(露積峰)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백제 온조왕과 관련한 속설을 들고 있다. 그 속설이란 곧 백제 온조왕이 이곳에 도읍을 정했는데 도적에게 포위를 당하게 되자 비모(飛茅)로 봉우리 전체를 다 덮으니, 적이 바라보고 양식이 넉넉한 것으로 잘못 알고 물러갔다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믿을 것이 못 된다고 하였다.
이어서 나월봉(蘿月峯), 남장대(南將臺), 대남문(大南門), 남춘대(藍春臺) 등에 대해서도 간략하게 언급하고 있다. 또 북한산 소재의 사찰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모두 열한 개의 사찰이 있다 하고 그것이 곧 서암사(西巖寺), 상운사(祥雲寺), 진국사(鎭國寺), 국녕사(國寧寺), 중흥사, 보국사(輔國寺), 보광사(普光寺), 태고사(太古寺), 부왕사(扶旺寺), 원각사(圓覺寺), 용암사(龍巖寺)라 하였다. 그리고 북한산에서 바라다 보이는 산들을 하나하나 들고 있는데 용문산(龍門山), 수락산, 차아산(嵯峨山), 청계산(淸溪山), 관악산(冠岳山), 계양산(桂陽山), 천마산(天磨山), 송악산(松岳山), 성거산(聖居山) 등이 기록할 만한 뛰어난 산이라 하고 있다.
4. 대동문~청절사
‘대동문’조에서는 대동문이 동장대에서 남쪽으로 수백 보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으며, 산 아래에 절경으로 일컬어지는 조계(曺溪) 폭포가 있는데 지금은 오랜 가뭄으로 물이 없다고 하며, 훗날 비 온 뒤의 폭포의 장관을 볼 것을 기약하고 있다.
‘수락 서계’조에서는 대동문으로부터 수락산에 이르기까지 간략한 여정을 기술한 후 수락산 서계(西溪)의 경관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대동문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길이 마치 양의 창자처럼 매우 경사지고 꼬불꼬불하여 이때부터 말을 버리고 걷기 시작했다 하였다. 동행한 기언정은 기력이 다해 바로 돌아가고, 유광천과 함께 도봉산으로 향하다가 주점에서 차를 마시고 수락산 서계로 들어가게 된다. 시내를 따라 골짜기 입구로 들어가니 흰 바위와 맑은 여울이 곳곳에 매우 기이하게 펼쳐져 있고, 소나무 숲의 푸른 그늘이 굽이마다 앉을 만하였다고 했다. 몇 리를 더 들어가 ‘세이정(洗耳亭)’이라 편액한 모정(茅亭)을 만나는데, 정자 아래 수석이 절묘하고 물이 반석 위로 지나가 마치 주름 잡힌 비단이 가볍게 감싼 것처럼 펼쳐져 흐르고 있었다고 했다. 바위 위에 ‘수락동천(水落洞天)’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보고 각각 절구 몇 수를 읊었다 하였다.
‘청절사’조에서는 청절사의 위치와 당시의 재사(齋舍)의 상태 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세이정에서 북쪽으로 수십 보 떨어진 곳에 청절사가 있는데, 이곳은 바로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1435~1493]의 영혼을 모신 곳이라 하고, 사당이 오래되어 황량하고 재사(齋舍)는 기울고 무너졌다고 했다. 사당 아래에서 절을 올리고 김시습의 초상을 본 감회를 기록하고 있다.
5. 도봉
‘도봉’조에서는 특히 도봉 서원의 배치에 대해 핵심적인 사항을 간략하게 기술하고 있다. 수락 서계에서 말을 타고 동문(洞門)에 이르러 바위 위에 ‘도봉동문(道峯洞門)’이라는 네 글자가 새겨져 있음을 보고 도봉 서원에 이르게 된다. 의인재(依仁齋)는 사당 앞 왼편에 있고, 또 그 왼쪽에 바로 습시재(習時齋)가 있으며, 의인재 앞 십여 보쯤 되는 곳에 계개당(繼開堂)이 있는데, 당 안에 어필로 ‘도봉 서원’이라 쓴 네 개의 큰 글씨가 걸려 있다고 했다. 동쪽에는 ‘침류(枕流)’라 편액한 당이 있고, 서쪽에는 ‘광풍(光風)’이라 편액한 당이 있다고 했다. 침류당(枕流堂) 서쪽에는 새로 작은 집을 지었는데, 재임(齋任)이 머무는 곳으로 편액은 없는 것 같으며, 그 서쪽에 영귀문(咏歸門)이 있다고 했다.
사당에 참배한 뒤 침류당에서 조금 쉬다가 영귀문으로 걸어 나와서 시냇가에 이르게 된다. 어지럽게 널려 있는 바위들이 서로 지탱하고 있는데, 과연 산에 유람온 뒤 처음 보는 장관이어서 가슴을 펴고 시를 읊으니, 문득 기수(沂水)에 가서 목욕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쏘이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바위 위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 한수재(寒水齋) 권상하(權尙夏)[1641~1721],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1606~1672], 한천(寒泉) 이재(李縡)[1680~1746] 등 여러 현인들의 글씨가 쓰여 있음을 보았다고 했다. 날이 저물어 의인재에서 묵고, 아침에 일어나니 가랑비가 부슬부슬 내려 서둘러 말을 몰고 돌아왔다고 하는 말로 글을 맺고 있다.
[특징]
「북한도봉산유기」는 일반적인 유기문의 구성을 잘 따르고 있다. 그러면서도 유람 도중의 감회나 여정, 에피소드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기보다는 북한산과 도봉산을 구조적으로 상세히 적시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서술 덕분에 북한산과 도봉산에 위치했던 구조물들의 소상한 위치를 확인할 수 있다.
[의의와 평가]
「북한도봉산유기」는 북한산과 도봉산에 있던 누대(樓臺)와 행궁(行宮), 사찰, 서원 등의 위치를 비교적 상세히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특히 18세기 후반의 도봉 서원의 배치에 대해 소상하게 알 수 있다. 「북한도봉산유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사당인 정로사(靜老祠), 강당인 계개당, 동재(東齋)인 습시재, 그리고 침류당과 광풍당(光風堂), 재임이 머무는 고직사(庫直舍), 영귀문의 위치가 비교적 소상히 확인된다. 특히 고직사는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한 것도 중요한 정보이다. 18세기 후반이 되어 도봉 서원이 완전한 모습을 갖추게 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