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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92년부터 1910년 일본에 의하여 국권을 강탈당할 때까지의 전라도 광주 지역의 역사. ‘광주’라는 명칭은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 처음 사용된 이후 해양·익주·화평·무진으로 불리었으며, 목(牧)·부(府)·주(州)·현(縣) 등 등급의 변화가 빈번하였다. 1373년(공민왕 22) 광주목이 되면서 목사가 파견되는 큰 고을이 되었는데, ‘광주목’은 조선 초에도 그대로 유지되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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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와 조선시대에 시험을 통해 관리를 선발하던 제도. 과거제는 학문적 능력을 가려 관리를 뽑는 제도로, 고려시대인 958년(광종 9)에 처음 도입되어 조선 말까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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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광주 지역[현 광주광역시 일대]의 별칭. 광주 지역은 백제 이래 무진주, 무주라고 불리다가 고려시대인 940년(태조 23) 이후 광주라 불렸다. 조선시대인 1489년(성종 20), 광주가 광산으로 읍호가 강등되면서 광산현으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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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 축조되었다가 1910년대 일제에 의해 파괴된 광주광역시의 읍성. 광주성은 조선 초기에 동헌과 객사 등 관아가 있었던 읍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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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지역방어 체제였던 진관체제 당시 전라도에 설치된 7개의 거진 중 하나. 1457년(세조3) 조선의 방위 체제가 진관체제로 개편된 후 전라도에는 7개의 거진(巨鎭)이 설치되었다. 7개의 진은 광주진을 비롯하여 나주진, 장흥진, 남원진, 부안진, 순천진, 전주진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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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도 광주목에 설치하여 운영한 경양도의 역. 경양도(景陽道)는 경양역(景陽驛)을 중심으로 하여 운영된 역도(驛道)로서 광주~옥과~곡성, 광주~동복~능주 등으로 이어지는 역로를 관할하였다. 경양도를 관리하는 임무를 맡은 것이 경양역 찰방(察訪)인데, 종6품직에 해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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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7년에 광주목이 광산현으로 강등된 사건. 『성종실록』에 광산현 강등 사건과 관련된 기록이 전하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의정부(議政府) 좌찬성(左贊成) 이철견(李鐵堅)이 와서 성종에게 아뢰기를, “광주 판관 우윤공은 신의 생질(甥姪)인데, 이달 초2일 밤2경(更)에 관아(官衙)로 돌아올 때, 누가 쏜 화살에 맞아 왼쪽 팔뚝을 다쳤습니다. 그런데도 아전(衙前)들은 매우 경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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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0년 광주목이 무진군(武珍郡)으로 강등된 사건. 조선시대에도 고려시대처럼 읍리, 민의 수령에 대한 행패나 모반, 강상죄 등을 범하면 그 고을 자체를 폐지하거나 강등, 인근 군현에 병합시켰다. 고을의 강등은 곧 외관의 격이 강등됨을 말하며 이와 함께 읍호의 개칭도 뒤따르게 된다. 『세종실록(世宗實錄)』에는 광주목사 신보안(辛保安)과 기생 소매의 간통 사건과 살인자로 광주고을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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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89년 정여립의 모반으로 전라도 광주를 포함한 동인의 사림들이 다수 화를 당한 사건. 기축옥사는 1589년(선조 22) 정여립(鄭汝立)[1546~1589]의 모반으로 사림세력이 화를 당한 사건으로, 약 3년 동안 1,000여 명에 이르는 동인의 사림들이 처형당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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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부터 1598년까지 2차례에 걸쳐 일본군이 조선을 침략하여 전라도 광주를 비롯한 조선 전역에서 일어난 전쟁. 임진왜란은 임진년에 일어났다 하여 임진왜란이라 하며, 제2차 침략을 정유재란이라고 한다. 임진왜란 당시 관군이 힘을 쓰지 못하고 무너지며 한양이 함락되자, 전라도 광주 지역을 비롯한 호남 각지에서 김천일·고경명·김덕령·최경회 등이 의병을 일으켜 이에 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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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47년 광주향교(光州鄕校)의 향안이 파기된 사건. 전라도 광주는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이후에도 오랫동안 기존의 사족들이 향권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얼마 후 신향 세력의 도전으로 광주의 향촌 사회에도 커다란 동요를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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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0년 광주향교(光州鄕校)의 유안(儒案)에서 56명의 명단을 삭제한 사건. 광주향교 유적도할 사건은 1660년(현종 1) 누군가가 광주향교에 보관된 유안에서 유생 56명의 명단을 삭제한 사건이다. 유안을 훼손한 사람이 누구인지, 사건 후 처리 과정에서의 광주향교 내 갈등 상황이 어떠하였는지 등에 관해서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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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락논변을 중심으로 기정진의 저작인 「납량사의」를 둘러싸고 발생된 성리학적 논쟁. 18세기 이후 기호학계의 최대 쟁점이었던 호락논변(湖洛論辨)은 근 2세기에 걸쳐 조선의 학문과 사상을 비롯하여 정치와 사회 등 다방면에서 발생한 논변이다. 조선성리학의 최대 쟁점이었던 사단칠정(四端七情)에 대한 이기론적(理氣論的) 해석에서 제기된 성리학적 주제를 계승하고 있다. 19세기에 접어들어 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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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이황과 기대승 간에 전개되었던 사단칠정에 관한 논변. 사단칠정논쟁은 조선 중기에 발생한 조선성리학의 대표적인 철학 논쟁으로 기대승(奇大升)[1527~1572]과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8년 동안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사단[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과 칠정[희(喜), 노(怒), 애(哀), 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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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 기정진이 1878년 작성한 「외필」의 성리설에 관한 노사학파와 여타 성리학자들의 논쟁. 외필논쟁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의 이(理) 중심의 성리설(性理說) 입장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외필(猥筆)」에 대하여 기호학계 전반으로 확대된 논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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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종 때에 전라도 광주 부용정에서 김문발에 의해 시행된 향촌의 자치 규약. 향촌의 자치 규약인 향약은 조선시대 보급되었다.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는 태종 때 김문발(金文發)[1359~1418]에 의해 시행되었으며, 이선제(李先齊)[1390~1453] 등에 의해 계승, 발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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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사회와 정치를 주도한 유학자와 선비 세력에 대한 호칭. 사림은 조선시대 유학자들을 가리키는 용어로 조선시대 훈구파가 정계에 진출하여 활동하였던 것과는 달리 향촌 사회에 성리학적 이상을 실현하고자 실천한 유학자들을 말한다. 전라도 광주 지역의 사림은 조선시대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실천적 의리 정신을 중시하고 개혁 지향적이고 실천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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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광주 지역에서 임진왜란으로 국가가 위태로울 때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하여 싸웠던 군대 또는 그 군대의 구성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마자 경상도, 충청도를 통해 진격한 왜군은 금세 한양까지 함락하였다. 한편, 다른 지역에 비교해 왜군의 침략을 덜 받았던 전라도 지역에서는 관군이 활약하고 있었음에도 자신들의 지역을 지키고자 많은 의병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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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학파의 전통을 계승한 조선 말 성리학계의 간재 전우의 학설을 계승한 성리학자 집단.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와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을 계승하는 기호학파의 전통을 이어받아 조선 성리학의 마지막을 장식한 대표적 인물이다. 간재 전우의 학설은 "도는 지극히 존귀한 실체이고 만물의 주가 되는 것이다. 만약 그것을 끌어내려 작용이 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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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후기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기정진 및 제자들에 의하여 호남의 대부분 지역에서 배출된 문인 집단. 노사학파(蘆沙學派)는 조선 성리학의 전개에 있어서 말기에 조선 성리학 자체 내의 여러 논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서구 세력의 침탈에 맞서 위정척사의 정신으로 싸우는 실천적 도학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노사학파는 호남 지역의 인물뿐만 아니라 서부 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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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것(正)을 지키고 잘못된 것을 물리친다."는 뜻으로, 조선 후기에 발생한 서양의 문물과 종교를 배격하는 운동. 19세기 중반 이후 심화되어 가는 조선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고,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한 사회 개혁론이다. 조선을 위협하는 국내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개혁적인 시도였으나, 기존의 성리학적 질서만을 옳은 것으로 규정하는 개혁이라는 점에서 그 한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