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4300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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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河東淸溪寺勸修定慧結社文 |
분야 | 역사/조선시대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길 67-182[안계리 801-1]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김종민 |
문화재 지정 일시 | 2014년 3월 20일 - 하동 청계사 권수정혜결사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53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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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하동 청계사 권수정혜결사문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
저술 시기/일시 | 1190년 - 하동 청계사 권수정혜결사문 저술 |
간행 시기/일시 | 1200년 - 하동 청계사 권수정혜결사문 인쇄, 반포 |
간행 시기/일시 | 1608년 - 하동 청계사 권수정혜결사문 중간 |
소장처 | 하동 청계사 -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길 67-182[안계리 801-1] |
성격 | 결사문 |
저자 | 지눌(知訥) |
권책 | 1책 |
행자 | 9행 17자 |
규격 | 13.4㎝[반곽 가로]|19.0㎝[반곽 세로] |
어미 | 상하 내향 흑어미 |
권수제 | 勸修定慧結社文 |
판심제 | 文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
[정의]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청수사에 있는 고려 후기 고승 지눌이 저술한 결사문.
[개설]
하동 청계사 권수정혜결사문 은 지눌(知訥)[1158~1210]이 1190년(명종 20) 승려들에게 정(禪定)과 혜(智慧)를 함께 닦을 것(雙修)을 강조하기 위하여 저술한 결사문(結社文)이다. 당시 불교계가 자신의 본분보다는 세속의 명리를 탐하고 자파의 이익만을 구해 교종과 선종의 대립상이 심한 것을 개탄하고 이를 혁신하기 위해 결사를 조직하려는 목적을 담고 있다. 내용은 문답형식으로, 결사의 목적과 정혜의 수행법 등을 수록하였고, 그 중간마다 『원각경(圓覺經)』 등의 불교 경전 및 과거 조사들의 말을 인용하였다. 인쇄 및 반포는 1200년(신종 3) 결사를 공산에서 조계산으로 옮긴 후 이루어졌다. 결사는 고려 무인 집권기 하의 새로운 불교계 운동으로 주목된다. 조계종의 연원 문제와도 관련 깊은 자료로 2014년 3월 20일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553호로 지정되었다.
[저자]
지눌의 성은 정씨(鄭氏)이고, 자호는 목우자(牧牛子)이다. 지눌은 법명이다. 황해도 서흥(瑞興) 출신이며, 아버지는 국학(國學)의 학정(學正)을 지낸 광우(光遇), 어머니는 개흥군(開興郡) 출신의 조씨(趙氏)이다. 선종(禪宗)의 중흥조로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창하여 선과 교에 집착하지 않고 깨달음의 본질을 모색하였다.
[편찬/간행 경위]
하동 청계사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의 권말에 “대명 만력 삼육년 무신 유월일 순천부 송광사 중간(大明萬曆三六年戊申六月日順天府松廣寺重刊)”이라는 간행 기록이 있어 1608년 순천의 송광사에서 중간(重刊)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형태/서지]
1책의 목판본으로, 표지 서명은 ‘結社文(결사문)’이며, 권수제는 ‘勸修定慧結社文(권수정혜결사문)’, 판심제는 ‘文(문)’이다. 제책의 형태는 오침안선장본(五針眼線裝本)이며 판식은 사주단변(四周單變)에, 반곽(半郭)의 크기는 가로 13.4㎝, 세로 19.0㎝이다. 계선이 없고(無界), 9행 17자로 배열되어 있다. 판심은 상하백구(上下白口)에 상하 내향 흑어미(上下內向黑魚尾)이며, 종이의 지질은 닥종이로 되어 있고, 세로 발끈 폭은 약 1.6~1.9㎝이다. 표지는 붉은색으로 염색하였다. 권수제 하단에 ‘설호(雪醐)’로 표기된 주인이 있으며, 본문의 하단에 ‘최언양(崔彦兩)’, ‘도신(道信)’, ‘조손(曺孫)’, ‘의현(義玄)’ 등의 시주자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구성/내용]
권두에 서문에 해당하는 글이 있고, 다음에 여섯 차례의 문답을 통해서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하는 이유 및 수행하는 이들이 갖기 쉬운 의문을 풀어 주고 있다. 서(序)에서는 “한 마음 미혹하여 가없는 번뇌를 일으키는 이는 중생이요, 한 마음 깨달아 가없는 묘한 작용을 일으키는 이가 부처.”라고 정의하였고, 마음을 떠나서는 부처가 될 수 없음을 밝혔다. 그리고 불교의 모든 가르침이 모든 반연(攀緣)[얽힌 인연]을 쉬고 마음을 비워서 가만히 합하고 밖에서 도를 구하지 않아야 하며, 마음을 허공처럼 맑게 하는 데 있다고 정의하고, 수행인들이 마음을 밝히는 일보다는 자기 이익만을 탐하고 헛되이 의식을 허비하는 현실을 개탄하였다.
첫째는 “바른 도가 가려진 말법(末法)의 시대에는 선정과 지혜를 닦기보다는 염불로써 극락정토에 왕생하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하는 물음에 대한 대답이다. 지눌은 시대가 변하더라도 심성은 변하지 않는 것임을 명시하고, 염불이나 경 읽기 등이 모두 필요한 수행이지만 선정과 지혜가 모든 수행의 근본이 되며, 행하기 어렵다 하여 금생에 닦지 않으면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닦기 어려워짐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말세라는 시대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망령된 마음가짐에 있는 것이라고 보고, 정법과 말법 시대를 논하기보다는 제 마음의 어둡고 밝음을 걱정할 것과 분수를 따라 수행하여 바른 법과 인연을 맺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둘째는 “선을 닦는 사람이 신통(神通)을 나타내지 못하는 까닭이 무엇인가?”를 물었다. 지눌은 신통이란 불심을 바로 믿는 법의 힘을 따라서 더욱 수행하여 공을 쌓음으로써 얻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하고, 얼어붙은 못이 모두 물인 줄 알지만 햇빛을 받아야 녹고, 녹아야 논밭에 물을 대거나 물건을 씻을 수 있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지혜와 선정에 의지하여 마음의 온갖 망상을 제거하면 신통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므로, 지엽적인 문제에 애착을 가지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셋째는 “참된 성품이 본래부터 원만히 이루어진 것이라면 마음에 맡겨서 자유롭게 하는 것이 옛 성현의 가르침에 따르는 것이 분명한데, 무엇 때문에 다시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하는가?”를 물었다.
지눌은 ‘심성이 본래 깨끗하고 번뇌는 본래 빈 것’임을 믿어 알고 밖으로는 계율을 지니면서 구속이나 집착을 잊고, 안으로는 선정을 닦으며 애써 누르지 않게 될 수만 있다면 마음에 맡겨 자유로이 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러나 현재 도를 닦는 사람들이 깊은 신심이 없어서 수행하지 않고 방치하면 더욱 타락하게 되므로 선정과 지혜를 닦아야 할 뿐 아니라, 마음을 거두어 잡아 안으로 비추어 보되 먼저 고요함[寂寂]으로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리고, 다음에는 또랑또랑함[惺惺]으로 혼침한 정신을 다스려 혼침과 산란을 고루 제어할 것을 당부하였다.
넷째는 “제 마음을 비추어 보아 불도를 이루게 한다는 것은 상등의 근기(根機)가 아니면 힘든 것이 아닌가?” 하는 물음에 대한 답이다. 부처는 중생들이 제 마음의 신령함과 자재함을 알지 못하고 밖을 향해서 도를 구하는 것을 염려하여 여러 가지 가르침을 보인 것이라고 하고, 스스로 제 마음을 속여 믿지도 않고 닦지도 않는다면 결코 이룰 수 없다고 하였다.
다섯째는 “교종에서 52위(位)의 수행법을 세워 오랜 세월 동안 닦아 가는 것에 비추어 볼 때, 선종에서 또랑또랑하고 고요함의 두 가지 법에 의해 혼침과 반연하는 생각을 다스림으로써 부처의 지위를 얻게 된다는 것이 모순이 있는 것이 아닌가?”를 묻고 있다.
지눌은 교종에서 온갖 행을 다 닦지만 그것 또한 무념(無念)을 종(宗)으로 삼고 무작(無作)을 근본으로 삼는 것이므로, 선종에서 고요함과 또랑또랑함으로써 수행하여 본성에 곧바로 계합하도록 하는 것과 조금도 다를 바가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기신론(起信論)』·『오위수증도(五位修證圖)』·『법집별행록(法集別行錄)』 등을 인용하여, 수행이란 결국 고요함과 또랑또랑함으로 집약된다는 것을 입증하고 있다.
여섯째는 정토왕생을 위한 수행과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수행의 차이점에 대해서 밝혔다. 왕생을 위한 수행은 결국 마음을 맑게 하는 것이므로 왕생을 구하지 않더라도 ‘다만 마음뿐’임을 밝게 알아서 지혜와 선정을 닦으면 저절로 정토에서 날 수밖에 없음을 주장하고, 염불 또한 일행삼매(一行三昧)를 성취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보았다. 끝으로 지눌은 정혜 결사를 하게 된 경위 등을 밝히고 있다.
[의의와 평가]
하동 청계사 『권수정혜결사문(勸修定慧結社文)』 과 동일한 간본인 1608년 송광사에서 중간한 권수정혜결사문이 국립 중앙 도서관과 충남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608년’ 및 ‘송광사’라는 명확한 간행 기록이 남아 있고, 시주자에 대한 기록 및 인출·보존 상태가 완전하여 양호한 책이다. 임진왜란 이후의 판본이지만 한국 불교사에 매우 귀중한 서적으로 종교적, 학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