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0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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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國內唯一-石刻蓮花圖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창덕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송화섭 |
현 소재지 | 팔왕리 남근석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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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소재지 | 창덕리 남근석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창덕리 |
[팔왕리와 태촌리의 풍수 비보 입석]
순창읍에서 강천산 방향으로 쭉 가다가 팔덕면으로 들어가면 각각 ‘팔왕리 남근석[산동리 남근석]’과 ‘창덕리 남근석’이라는 푯말을 볼 수 있다. 남근석(男根石)은 매우 호기심이 당기는 단어이다. 얼마나 자랑할 만한 남근석이기에 안내 푯말까지 버젓이 내걸었을까. 그런데 막상 순창군 팔덕면 산동리 팔왕 마을과 창덕리 태촌 마을에 찾아가 살핀 남근석은 전혀 엉뚱한 모습으로 눈에 들어온다. 힘이 잔뜩 든 발기된 남근석일까, 정말 보기 좋은 남근석일까 하는 기대와는 거리가 멀다. 묵직한 조형 입석이 세워져 있을 뿐 남근석과 닮은 데라고는 찾아볼 수 없다.
[팔덕면의 남근석은 연봉석이다]
산동리 팔왕 마을 입석의 표면에는 연봉오리, 연꽃, 연잎이 조각된 연화도(蓮花圖)가 장식되어 있다. 한마디로 석각 연화도가 조각된 입석이다. 그런데 왜 남근석이라고 이름 붙였을까? 아마도 문서상에 처음 이름을 등기한 자의 실수 또는 무지(?)였거나, 처음으로 현지 조사를 실시한 어설픈 민속학자의 문화 왜곡이 가져온 참담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마을 사람들이 미륵이라고 섬기는 연봉석을 남근석이라고 이름 붙인 것은 1960년대 초 팔덕면사무소 서기 박찬문으로 알려졌다. 아마도 국내에서 마을 입석에 석각 연화도를 조각한 것은 산동리 팔왕 마을과 창덕리 태촌 마을이 유일할 것이다. 석각 연화도는 매우 정교하고 사실적이어서 예사스럽지가 않은데, 남근석이라는 선입견 때문에 연화도가 가진 역사와 문화를 깊게 들여다보려고 하지 않는다. 매우 성스러운 연화도를 가장 속되게 만든 것이 바로 이 남근석이라는 용어다. 하루빨리 명칭을 변경하여 문화재적 가치가 재평가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창덕리 팔왕 마을 입석의 실상은 무엇인가.
[팔왕 마을 연봉석]
산동리 팔왕 마을 연봉석 맨 위쪽에는 마을을 향하여 연잎 한 장이 새겨져 있다. 이 연잎은 왜 이 연봉석이 세워졌는가를 밝혀 주는 상징적 문양이다. 팔왕 마을 가운데에는 바가지샘이라는 공동 우물이 있었다. 마을 주민들은 이 바가지샘에서 분출하는 우물을 ‘음물’이라고 하였다. 음물은 여자의 생식기에서 솟아나는 물이라는 뜻이다. 바가지샘이 있는 곳에 ‘인정샘 여근곡’이라는 명문이 있다. 여근곡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인정샘’이라 한 것이다.
그렇다면 팔왕 마을의 풍수지리를 먼저 살펴보자. 팔왕 마을은 광덕산의 지맥이 태봉산을 거쳐 동남으로 낙맥하는 곳에 혈처(穴處)를 이뤘다. 마을의 좌향(坐向)은 동향이지만 남향 못지않게 양기 명당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마을의 지세는 파왕산동형(婆旺産僮形)으로 여성의 하복부를 닮은 여근곡(女根谷) 형세이다. 파왕산동은 ‘노파가 왕성하게 동자들을 낳는 형국’이라는 뜻이다. 이러한 풍수지리의 영향인지 실제 팔왕 마을에서는 가문의 대가 끊기거나 손이 귀하거나 아들을 낳지 못하는 집이 없다고 한다.
팔왕 마을의 형세는 광덕산에서 내려온 주맥이 여근곡처럼 둘려 있고 여근곡 가운데에 여근암(女根巖)이 있다. 그 여근암이 마치 바가지처럼 타원형으로 움푹 패었는데, 그 가운데 물구멍에서 샘물이 솟아 나온다. 마을 부녀자들이 물동이를 이고 이곳에 와서 식수를 길어 가는 마을 공동 우물이었다. 여근곡의 여근암은 꼭 여성의 음부를 닮은 바가지형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 바가지샘에서 솟아나는 샘물을 매일같이 식수로 사용해 왔던 것이다.
이 바가지샘을 훼손한 것은 새마을 운동의 광기였다. 팔왕 마을에 상수도 시설을 한다고 바가지샘의 분출수를 메우고 그 옆에 식수공(食水孔)을 뚫어 저장 탱크에 물을 받는 시설을 하면서 바가지샘은 자취를 감추었다. 근년에 바가지샘을 복원하면서 바가지샘의 모형을 조성해 놓고 식수공에서 분출하는 물을 우물 형식으로 조성해 놓았다.
팔왕 마을의 바가지샘에서 바라보면 맞은편 언덕에 조형 입석 1기가 세워져 있다. 입석의 크기는 높이 178㎝, 지름 40㎝의 원형 석주 형태이다. 팔왕 마을은 여자의 샅형 지세라서 마을 앞이 급격한 내리막길이었는데, 마을의 지기(地氣)가 흘러 빠지는 것을 방지하고자 토축(土築) 제방을 쌓고 제방 위에 나무를 심어 마을 숲을 조성한 것이다. 마을 제방과 마을 숲은 풍수 비보(裨補) 장치라 할 수 있다.
연봉석은 팔왕 마을 제방 가운데에 세워 놓은 것이다. 연봉석은 바가지샘을 향하고, 바가지샘에서 바라보면 정면 맞은편에 연봉석이 세워져 있다. 이 연봉석은 바가지샘이 위치한 여근곡의 음기를 누르고자 세운 풍수 비보 입석이다. 연봉석은 남근 기능의 압승형 풍수 비보 입석일 뿐 남근석은 아니다. 팔왕 마을이 음기가 센 마을이기에 음기를 눌러 주어 마을의 평안을 추구하려는 음양 조화의 상징적 입석이다. 단순히 여근곡을 향하여 세워 놓은 풍수 비보 입석이지 남근석은 아니라는 의미다. 그리고 풍수 비보 입석을 자연석이 아닌 연꽃, 연잎, 연봉오리, 연꽃잎을 조각한 연봉석으로 세워 놓은 것이다.
팔왕 마을에는 연봉석과 관련하여 두 가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가) 한 여장수가 돌 두 개를 치마폭에 싸 가지고 오다가 무거워 한 개는 창덕리 태촌 마을에 버리고 나머지 한 개를 가져와 이곳 팔왕 터에 세웠다.
(나) 옛날 골밭에 젖이 네 개인 설씨 부인이 살았는데, 쌍둥이를 4배 낳아서 그 8명 자식이 모두 잘되어 영달하였고, 고향에 올 때면 마을 입구에서 말에서 내려서 걸어왔다.
(가) 전설은 여장수가 입석을 치마폭에 싸 가지고 와서 팔왕 마을에 1기를 세웠다는 것이다. 치마폭에 선돌을 들고 다니는 힘센 여장수는 우리나라 전설에 나오는 마고할미와 같은 존재다. 마고할미는 대지 모신(大地母神)으로서 등장하는 사례가 많다. 여장수는 단순히 힘센 여성이라기보다는 마을을 태동시키고 살기 좋은 이상향의 공간으로 만들고자 한 위대한 여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팔왕 터에 입석 1기를 세운 여인은 누구일까. 마고할미 같은 신화적인 인물일까, 아니면 위대한 어머니 같은 존재일까. 마고할미가 마을과 지역 등 신화적 공간을 창조하는 여신적 존재라면, 대모는 영웅적 인물을 탄생시키고 양육하여 성장시키는 보모 같은 여신적 존재라는 차이가 있다.
(가) 전설의 여장수는 (나) 전설에서 설씨 부인으로 등장한다. 설씨 부인은 팔왕 마을에서 위대한 능력을 가졌던 여신적 존재였음을 알 수 있다. 그 여신적 존재는 마고할미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팔왕 마을의 풍수 형국인 파왕산동형의 ‘파(婆)’ 자도 노파(老婆)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팔왕 마을에 처음 입향한 설씨 부인이 자손을 번창시켜 후대에 위대한 어머니[대모]로 숭상된 것으로 추정된다.
설씨 부인은 처음 골밭에 명당 터를 잡고 8명의 아들을 낳아 잘 양육해서 집안을 번성하게 한 위대한 대모였던 것이다. 설씨 부인은 8명의 아들을 낳아 영달할 정도로 키워 낸 훌륭한 어머니다. 설씨 부인은 팔왕 마을에 터를 잡은 설씨 집안의 어머니이다. 순창 지역 설씨 가문은 옥천 설씨(玉川薛氏)를 말하며, 후에 순창 설씨(淳昌薛氏)로 불린 순창 지역의 대표적인 문벌 가문이다.
(나) 전설에 등장하는 설씨 부인은 문헌에도 등장한다. 『고려사(高麗史)』 열전 설공검전의 “설공검은 순창군 사람이다. 그의 아버지 설신은 과거에 급제하였고 관리로서 유능하다는 칭이 있었으며 관직이 추밀원 부사에까지 이르렀다. 설신의 어머니 조씨는 젖이 네 개 있고 아들을 여덟 명 낳았는데 그 중 세 명이 과거에 급제하였기 때문에 국대부인의 작호를 받았다.[薛公儉淳昌郡人父愼登第以吏幹稱官至樞密院副使愼母趙氏四乳而生八子三子登科封國大夫人]” 가운데 “젖이 네 개 있고 아들을 여덟 명 낳았는데 그 중 세 명이 과거에 급제하였다(四乳而生八子三子登科)”는 것이 (나) 내용과 일치한다. 구전에서는 여성의 주체가 설씨 부인이지만 문헌에는 조씨 부인으로 나온다. 설씨 부인은 순창 설씨 가문을 번창시킨 신격화된 설씨 가문의 어머니이고, 조씨 부인은 옥천 조씨 가문의 실존 인물이다.
조씨 부인은 팔왕 마을에서 자손을 번창하게 한 설씨 가문의 대모 같은 존재다. 조씨 부인은 네 개의 젖으로 8명의 아들을 잘 키워 집안을 일으킨 공과를 인정받아 국대부인에 봉하여졌다. 설씨 집안으로 시집온 조씨 부인이 8명의 아들을 낳아 3명을 등과시키면서 위대한 여인으로 숭상되었던 것이다.
(나) 전설에 나오는 ‘골밭’은 팔왕 마을에 위치하는 실제 지명이다. 골밭에서는 고려 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기왓장들이 출토되었다. 설씨 부인은 순창 지역의 성황 대신인 설공검의 할머니이다. 『고려사』 열전 설공검전에 등장하는 조씨 부인 이야기가 ‘순창 성황 대신 사적 현판’에도 등장하고 있다. 순창 성황 대신 사적 현판에는 『고려사』 열전 설공검전의 “고려 설공검은 추밀원 부사(樞密院副使) 신(愼)의 아들이다. 신의 어머니 조씨(趙氏)는 네쌍둥이로 여덟 아들을 낳았다. 세 아들이 과거에 올라서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해졌다"는 내용이 재인용되고 있다. 설공검은 설신(薛愼)의 아들이고 설신은 조씨 부인의 아들 가운데 한 명이다. 말하자면 설신은 여덟 명의 아들 중 과거에 급제한 세 아들 가운데 한 명이다.
네 개의 젖으로 8명의 아들을 잘 키워 그중 세 명을 과거에 급제시킨 주체는 설씨 가문이 분명하다. 설신의 어머니 조씨 부인은 설선필(薛宣弼)의 부인이다. 설선필은 1126년(인종 4) 이자겸(李資謙)의 난을 피해 아내의 고향으로 들어온 입향조 설자승(薛子升)의 손자이다. 조씨 부인은 예부 시랑을 지낸 조영수(趙永綏)의 딸이다. 옥천 조씨는 순창의 옛 지명인 옥천을 본관으로 하는 토성 씨족이다. 조영수의 딸과 설자승의 손자인 설선필이 혼인하여 외척 관계를 맺은 것이다. 설선필은 조씨 부인과 혼인하여 현재의 팔왕 마을에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팔왕 마을에서 쌍둥이를 네 번이나 낳아 키우고, 그 아들들을 과거에 급제시켜 관직에 내보낸 출중한 능력으로 후대에까지 전설적인 인물로 전해 온 것이다. 조씨 부인은 이러한 자식 양육과 입신출세의 공을 인정받아 국대부인에 봉하여졌다. 비록 여덟 아들 중 세 아들만 등과했지만, 여덟 아들이 모두 현달하여 ‘팔원군(八元君)’이라 불렀다고 전해 온다.
설선필과 조씨 부인이 이 마을에 살던 시기는 대략 1200년경 전후의 시기로 추정된다. 순창 설씨 입향조인 설자승이 처음 정착한 곳은 회문산(回文山)을 끼고 있는 순창군 구림면 율북리였는데, 그다음 대에 팔덕면 월곡리[설고개]로 옮겨 와서 살다가 설선필 대에 드넓고 비옥한 평야를 낀 팔등방(八登坊)으로 옮겨 살기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팔왕 마을은 평야가 넓게 조성된 분지의 구릉에 위치하고 있다. 광활한 옥토는 설선필 대에 와서 경제력이 향상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며, ‘팔자 삼자 등과’는 설씨 가문의 번창을 상징적으로 말해 준다. 설선필 대에 이르러 경제력 향상과 가문의 번창으로 순창 설씨는 일약 순창의 명문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조씨 부인은 신화적 인물로 후대에 전해지면서 젖을 네 개나 가진 신격화된 인물로 묘사되었던 것이다.
팔왕 마을은 고려 말 조선 초 팔자(八子)가 등과한 마을이라 하여 ‘팔등방(八登坊)’으로 불렸고, 조선 후기에 다시 팔등방(八等坊)으로 바뀌었다. 설씨 집안의 입신출세한 팔자의 ‘팔(八)’과 풍수형국상 파왕산동의 ‘왕(旺)’ 자가 합성되어 팔왕리(八旺里)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설선필이 팔왕 마을로 들어와 터를 잡고 풍수 비보의 장치물로 연봉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지형상 양택 명당으로는 흠집이 없으나 여근곡의 여근샘이 문제였던 것이다. 이에 음양 풍수의 조화를 갖추고자 여근암의 맞은편에 남근 기능의 연봉석을 세운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팔왕 마을의 입석은 설선필이 생존하던 1200년대 초에 세워진 풍수 비보 입석이라 할 수 있다.
여근의 기를 누르려고 입석을 세운 것이라면 남근석으로 세울 수 있었건만 입석에 연화문을 조각한 것은 마을을 처음 조성하면서 불국토(佛國土) 같은 풍요롭고 평안한 마을이 되기를 소망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연꽃은 불교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탄생 또는 신화적 창조를 의미하는 꽃이다. 팔왕 마을 연봉석은 불교가 성행하던 고려 후기에 마을이 생성되면서 불교의 연화장 세계(蓮華藏世界)를 실현하고픈 의도에서 조성한 것으로 보인다.
[태촌 마을 연봉석]
순창군 팔덕면 창덕리 태촌 마을에 서 있는 남근석이 창덕리 남근석으로 표기된 것은 태촌 마을이 행정 구역상 창덕리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가)의 전설에는 힘센 여장수가 2기의 입석 가운데 하나는 태촌 마을에 세우고 다른 하나는 팔왕 마을에 세웠다는 내용이 있다. 그렇다면 창덕리 남근석은 태촌 마을과 관련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그리고 여장수가 치마폭에 2기의 입석을 싸 가지고 다녔다는 것은 2기의 입석이 동시에 세워졌음을 의미한다. 또한 입석을 세운 주체도 동일한 집단이거나 가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사실은 태촌 마을의 남근석 역시 연봉, 연잎, 연꽃이 조각된 조형 입석이란 사실이 뒷받침해 준다.
팔왕 마을 연봉석과 태촌 마을 연봉석은 표현 양식에서는 차이가 있지만 기본적인 성격과 기능은 같다고 보아야 한다. 창덕리 남근석이 아니라 태촌 마을 연봉석이라는 표기로 바꾸어야 하며, 태촌 마을 연봉석이 왜 세워졌는지에 대한 명쾌한 해석이 뒤따라야 한다.
태촌 마을의 안산은 아미산(峨嵋山)이다. 광덕산의 맥이 태봉산으로 내려왔는데, 태사봉 아래에 마을이 들어섰다. 태촌 마을은 소쿠리 형국이라 하기도 하고 노태십가(駑駘十駕) 형국이라고도 한다. ‘태촌’의 ‘태(台)’ 자 지명도 ‘태(駘)’ 자에서 비롯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태촌 마을은 풍수지리적 구도로 보면 불균형이다. 마을이 주산보다는 안산이 더 높고 위압적이다. 태촌 마을 사람들에게 아미산은 숨 막히는 매우 불편한 대상임에 틀림없다. 태촌 마을 사람들은 이와 같은 풍수지리적 불균형을 해소하는 방법으로 아미산과 마을 사이에 비보 숲을 조성하여 숲으로 차단막을 설치하기도 하고, 연봉석을 아미산 자락에 세워 아미산의 기운을 진압하려는 의도에서 압승 기능의 연봉석을 세운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연봉석에 조각된 한 장의 연꽃잎 조각이 말해 준다. 팔왕 마을 연봉석에서도 같은 형식의 연꽃잎이 조각되었는데, 태촌 마을 연봉석 상단에 조각된 연꽃잎은 아미산을 향하여 장식되어 있다. 이 연꽃잎은 태촌 마을 연봉석이 아미산의 기운을 누를 필요성에서 조각되었음을 시사하는 문양이다. 연봉석은 높이 160㎝, 지름 40㎝의 원형 석주이다. 이 석주의 표면에는 연잎, 연꽃잎, 연꽃, 연봉오리가 조각되어 있는데, 연화도는 매우 사실적으로 조각되어 있다. 팔왕 마을 연화도가 정형화되어 있다면, 태촌 마을 연봉석은 연화도를 모사해 놓은 듯하여 회화성이 매우 높다고 할 수 있다. 또한 태촌 마을 연봉석에는 연화도에 잉어까지 묘사되어 있다.
태촌 마을 사람들은 이 연봉석을 ‘미륵’으로 섬겼고, 연봉석이 있는 곳을 미륵정이라고 부르고 있다. 태촌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따르면, 태촌 마을에서 연봉석을 기자석(祈子石)으로 삼고 공을 들인 결과, 아들을 얻어서 연봉석에 보호각을 세웠다고 한다. 흙으로 지은 토담집의 미륵당 안에 연봉석을 모신 것이다. 태촌 마을 주민들이 연봉석을 미륵으로 섬긴 것은 기자(祈子)의 영험이 깃들어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태촌 마을 주민 윤재복은 부모님이 연봉석에 기도하여 낳은 아들로, 마을 사람들은 미륵에게 빌어서 낳은 ‘미륵동이’라고 불렀다. 처음에는 아미산의 기운을 압승할 목적에서 세운 풍수 비보 기능의 연봉석이었지만, 후대에 기자 치성의 대상으로 신앙 된 것이다. 오랫동안 윤재복의 집안에서는 연봉석에 치성을 드렸다고 한다.
[국가 문화재급 석각 연화도]
석각 연화도가 조각된 연봉석은 국내에서는 순창 지역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조형 입석이다. 팔왕 마을 연봉석은 마을의 음기를 누를 목적에서 세운 진압형 풍수 비보 입석이고, 태촌 마을 연봉석은 아미산의 기운을 누를 목적에서 세운 진압형 풍수 비보 입석이다. 팔왕 마을과 태촌 마을의 연봉석은 같은 시기에 조각된 풍수 비보 입석이지만, 석주에 조각된 연화도의 양식에는 차이가 있다.
팔왕 마을 연봉석의 연화도는 연꽃, 연잎, 연봉이 정형화되어 있지만 태촌 마을 연봉석에는 연화도를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회화성이 돋보인다. 이와 같은 연봉석을 조각할 수 있는 시대적 배경은 고려 시대로 추정된다. 연꽃은 곧 불교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문양이다. 팔왕 마을과 태촌 마을을 처음 조성하면서 풍수지리적인 불완전한 구도를 보완하기 위하여 세운 풍수 비보 입석이지만, 동시에 마을을 연화장엄한 세계로 조성하고자, 마을을 불국토와 같은 정토 세계로 구현하려는 의도에서 세운 것으로 해석된다.
팔왕 마을의 전설을 역사적으로 고증한 결과를 연봉석과 연계하여 본다면, 태촌 마을과 팔왕 마을의 연봉석은 고려 후기 옥천 설씨 가문 또는 옥천 조씨 가문에서 조성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마을을 연화장의 세계로 가꾸려는 의도에서 세운 연봉석이라면, 고려 후기의 마을 문화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현재 팔왕 마을산동리 남근석은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4호, 태촌 마을창덕리 남근석은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15호로 지정되어 있지만, 하루빨리 연봉석이나 석각 연화도로 명칭을 변경하여 석주를 세운 본질이 훼손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불국 정토를 상징하는 연봉석을 남근석으로 왜곡하는 일도 있어서는 안 된다. 이는 편협한 문화 인식을 드러내는 것이라고밖에 할 수 없다. 하루빨리 전문가들의 자문과 고증을 받아 문화재적 가치가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