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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040
한자 改新敎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옥영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기독교의 한 분파.

[개설]

기독교는 크게 가톨릭[천주교]과 개신교 두 개의 종파로 나눌 수 있으며, 지금부터 약 2000년 전 이스라엘 수도 예루살렘에서 출발하였다. 그 후 로마 제국의 국교로 뿌리내리면서 전 유럽에 전파되었다. 기독교가 종교의 기능을 망각하고 타락해 갈 즈음 1517년에 일어난 종교 개혁가 마틴 루터를 중심으로 종교 개혁이 단행되었다. 이때 기독교를 개혁한다는 의미의 개신교가 구교인 가톨릭과 분리되었다.

개신교는 종교 개혁 운동과 함께 로마 중심의 교황 제도를 왜곡된 교회 제도로 보고 올바른 종교로 나아가기 위해 하나 둘씩 새로운 교파를 형성하면서 시작되었으며,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또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로 불리게 되었다. 한국에서는 고칠 개(改) 자와 새롭게 할 신(新) 자를 써서 개신교(改新敎)로 번역되었다.

한국 개신교는 만주에 있는 로스(J. Ross) 선교사의 전도로 1879년 백홍준·이응찬·김진기·이성하 등 네 명의 한국인이 세례를 받고 한국 최초의 개신교 신자가 되면서 시작되었다.

[전래]

순창군 지역에 처음 개신교가 전래된 것은 1897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회에서 전라남도 지방의 중심지인 나주에 선교부를 신설하고 선교 활동을 시작하여, 1904년에 광주 선교부를 개설하고 오원과 배유지 선교사가 순창에 정착, 담양과 순창을 오가며 교회를 설립하면서부터이다.

그 후 1910년 타마자(打馬字, Rev. J. V. N. Talmagy) 선교사가 내한하여 순창과 담양을 담당하다가, 일제 강점기 말엽에 순창 지역 목회자들과 함께 신사 참배를 반대하여 지역 신도인 박동완·김용선·조용택 등과 함께 옥고를 치르다 1942년 석방과 함께 추방되었다.

순창군 최초의 교회는 1902년 순창군 복흥면 반월리에 배유지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반월 교회이다. 『한국 기독교사』에는 “1902년 순창군 반월리 교회를 성립하다. 초에 선교사 배유지(裵裕祉)와 전도인 하창수(河昌洙) 등이 열심 전도하여 신자 백 여인을 엇고 예배당을 신축 하얏스며, 기후에 타마자·도대선(都大善)·변창연(邊昌淵)·김기찬(金基贊) 등이 시무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다음은 1907년 순창군 쌍치면에 쌍계 교회를 설립하게 되면서 그 세가 널리 확산되었다. 『한국 기독교사』에는 “1907년 순창군 쌍계리 교회가 설립하다. 선시(先是)에 선교사 배유지 조사 변창연·조석일(趙碩逸)의 전도로 인하야 신자가 30여 인에 달함으로 예배당을 신건하고 기후에 선교사 타마자·만월순(萬越淳)·도대선·김순경(金順敬)·고려위(高麗偉)·허화준(許華埈)·노병헌(盧秉憲) 등이 상계 시무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1912년 전남 노회가 조직되면서 쌍계 교회는 조직적으로 교회를 육성하였다. 1922년에는 김세열 조사가 목회를 하고 타마자를 적극적으로 도왔으며, 후에 평양 신학교에 진학하였다. 1940년에는 타마자 선교사가 일제 경찰에 미국의 간첩이라는 죄목으로 추방되었고, 쌍계 교회는 신사 참배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일제의 종교 정책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 이후 1953년 6·25 전쟁이 끝나고 김판기 집사를 중심으로 교회가 재건되었다.

배유지 선교사는 1908년 순창군 쌍치면 금성리에 금성 교회를 개척하였다. 『한국 기독교사』에는 “1908년 순창군 금성리 교회가 설립하다. 선시(先是)에 선교사 배유지가 파송(派送)한 전도인 조석일(趙碩逸)의 전도로 백 여인 귀주(歸主) 하얏스되 예배당이 무(無)하더니 불신자(不信者) 유모(劉某)가 소유여간(所有餘間) 호가(互家)를 1년간 무임 대여함으로 회집(會集) 예배하니라”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시에 백여 명의 신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 1910년 김창식(金昌植)·김우근(金宇根) 처·서기화(徐基化) 등이 금성리 교회를 설립하였다. 특히 4년제 기독 영흥 학교를 설립하여 박대권(朴大權)·손책남(孫責男)·이영휴(李永休) 등의 교사와 함께 가난한 농촌 산간에 있는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학문과 새로운 문화를 전하고 계몽하게 되었다. 그러나 1938년 일제의 강압에 못 이겨 금성 교회와 기독 영흥 학교는 일시에 폐쇄되었다. 6·25 전쟁 때에 순창 지역은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공산당 치하가 반복되면서 주민들이 많은 고통을 겪었다. 1953년 치안이 회복되자 이승길 전도사가 금성 교회를 재건하였다. 1954년 김원길 전도사가 부임하여 29년 동안 목회 활동을 하였다.

1908년 복상순·박성택 등이 구룡 교회를 설립하였다. 도대선 선교사가 구룡 교회를 관리하면서 점점 활기를 띠었으며, 김순경·고려위·이영희·김세열 등이 조사로 활동하면서 활성화 되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말엽 신사 참배 반대 운동으로 인해 강제 폐쇄되어 다시 재건되지 못하였다.

순창읍 교회의 설립 연도에 대하여서는 두 가지 설이 있는데, 순창읍 교회에서는 1913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타마자·배유지·도대선 세 명이 이사라·박삼수·배병택 과 함께 순창읍 옥천동 490번지의 가택을 구입하여 첫 예배를 본 1913년도를 설립 연도로 여긴다. 순창읍 교회를 설립한 박삼수는 6·25 전쟁 때 부모를 잃은 고아를 위해 순창 읍내에 고아원을 설립하였다. 현재는 시설도 확장하고 애육원, 어린이집, 양로원 등을 운영하고 있다.

순창 중앙 교회는 1952년 4월 5일 최의상(崔義祥) 집사의 집에서 예배를 보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가을에 순창군 남계리에 있는 옛 정미소를 매입하여 예배를 보았으며, 1955년에 지금의 순창읍 남계리 638-5번지로 이전하였다.

순창 제일 교회는 1965년 채규응, 노오래 등 몇 사람이 순창 농업 고등학교 관사를 기도처로 하여 시작하였다. 1966년 순창읍 순화리 188번지의 민가를 빌려서 순창 제일 교회라는 이름으로 첫 예배를 보았다.

[현황]

현재 전라북도 순창군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개신교 교회들은 주로 대한 예수교 장로회, 감리교계, 침례교계, 오순절계, 통일교계, 새일교계, 안식교계, 전도관계 등의 교파에 소속되어 있으며, 순창군 기독교 연합회에 가입되어 있는 교회 수는 73곳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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