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32 |
---|---|
한자 | 龜樂窩集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쌍치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손앵화 |
간행 시기/일시 | 1935년 - 『귀락와집』 간행 |
---|---|
소장처 | 전남 대학교 도서관 - 광주광역시 북구 용봉로 77[용봉동 300] |
성격 | 고도서|문집 |
저자 | 유광천 |
간행자 | 유정기|유영희|유병구|유병희 등 |
권책 | 16권 8책 |
행자 | 22행 10자 |
규격 | 21.3×15.6㎝[반곽] |
어미 | 상하향 일엽 화문 어미(上下向一葉花紋語尾) |
[정의]
전라북도 순창에서 거주한 조선 후기 유학자 유광천의 문집.
[저자]
유광천(柳匡天)[1732~1799]의 자는 군필(君弼), 호는 귀락와(歸樂窩)이며, 본관은 서산(瑞山)이다. 아버지는 유휘소(柳輝韶)이고, 어머니는 생원 이숙빈(李淑馪)의 딸 함평 이씨(咸平李氏)이다. 전라남도 광주 오호리에서 출생하였으나 이후 처가인 울산 김씨(蔚山金氏)의 세거촌 순창군 복흥면 사창(社倉)으로 이사하였다. 그 후 순창군 쌍치면 피노리로 이사하여 살았다. 미호(渼湖) 김원행(金元行)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이재(頤齋) 황윤석(黃胤錫),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 등과 교유하였다. 1759년(영조 35) 과거에 급제하여 경성 판관(鏡城判官), 헌납(獻納), 사간(司諫), 승지(承旨) 등을 지냈다.
[편찬/간행 경위]
유광천의 후손들에 의하여 『귀락와집(龜樂窩集)』 간행이 추진되어 1933년에 정기(鄭琦)가 행장(行狀)을, 1934년에 5세손 유영희(柳永禧)가 연보(年譜)를 작성하고, 6세손 유병구(柳秉九)와 유병희(柳秉熙)가 편집하였다. 서문은 따로 없고, 권말에 1935년에 유병구와 유병희가 쓴 발문(跋文)이 있다.
[형태/서지]
석인본(石印本) 16권 8책으로 되어 있다. 판식은 사주 쌍변(四周雙邊)으로 상하향 일엽 화문 어미(上下向一葉花紋語尾)이다. 반곽(半郭)의 크기는 21.3×15.6㎝이다. 1면 22행에 1행의 자수는 10자이다. 주(註)는 쌍행(雙行)으로 되어 있다. 전남 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권1~권4에는 시(詩) 640여 수, 권5~권9에 소(疏) 23편, 계사(啓辭) 6편, 차자(箚子) 2편, 상언(上言) 1편, 책(策) 1편, 일기 1편, 어제 경의 문대(御製經義問對) 9편이 실려 있다. 권10~권12에는 서(書) 84편, 잡저 10편, 서(序) 7편, 기(記) 13편, 발(跋) 14편, 표전(表箋) 2편, 상량문 1편, 축문 3편, 제문 11편, 행장 4편, 묘표 1편이 있고, 권13~권16은 부록으로서 후대인들이 「귀락와 원운(歸樂窩原韻)」에 차운한 시 107수, 만사(輓詞) 108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는 차운시, 만시, 유람시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연작시가 많은 점이 형식적 특징이다. 소(疏)가 많은 것은 오랜 관직 생활을 하면서 신하의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모습을 반영한다. 56세 때 쓴 「걸체인진사조소(乞遞因陳四條疏)」는 당시 인재 등용의 폐단, 세금의 부당한 징수, 관리들의 행태, 호남 지역 조세 제도의 문제점 등을 지적한 글이다.
「계사 의소(癸巳擬疏)」에서는 임금에게 병이 생기는 원인은 중화(中和)의 길을 잃고 국사에 번뇌하기 때문이라고 지적하고, 치료법이 오직 성인의 학문을 배우고 실천함으로써 덕치와 교화가 이루어져 나라가 태평해지면 결국에 군왕도 마음을 편안히 하고 몸을 쉴 수 있다고 하였다. 「논붕당책(論朋黨策)」에는 붕당을 만들지 말고 황극(皇極)의 중심을 세워서 탕평책(蕩平策)을 써야 한다는 정치관이 나타나 있다. 잡저 가운데 「산언(散言)」은 경전(經典)에서 뜻이 깊은 말들을 발췌하여 자신의 견해를 덧붙인 글로, 성리학적 식견을 엿볼 수 있다.
[의의와 평가]
『귀락와집』은 18세기를 살다간 호남 문인이 남긴 문집으로 앞으로 18세기 연구의 폭을 넓히는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비록 유광천이 관직 생활을 오래 했기 때문에 관각문인으로 생각할 수도 있지만, 시문에서는 문인의 면모도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