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86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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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寧金氏 |
분야 | 성씨·인물/성씨·세거지 |
유형 | 성씨/성씨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성용 |
세거|집성지 | 김녕 김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풍산면 두승리 |적성면 지북리|금과면 청룡리|금과면 대성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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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씨시조 | 김시흥(金時興) |
입향시조 | 김복(金福)|김집(金緝) |
[정의]
김시흥을 시조로 하고 김복, 김집 등을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김녕 김씨(金寧金氏)는 경주 김씨(慶州金氏) 시조 김알지(金閼智)의 39세손 김녕군(金寧君) 김시흥(金時興)을 시조로 하여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순창 지역 김녕 김씨는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후예인 영재(寧齋) 김복(金福)과 김집(金緝) 등이 풍산면 두승리와 적성면 지북리에 들어와 그 자손이 세거하고 있다. 그밖에 금과면 청룡리와 대성리에도 김녕 김씨 집성촌이 있다.
[연원]
김시흥은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9세손이다. 고려 인종 때 문과에 합격하여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김녕군에 봉하여졌으며, 명종 때에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벌하는 데 공을 세워 식읍을 하사받고 금주군(金州君)에 봉하여졌다. 이에 후손들이 그를 시조로 삼고 김녕을 본관으로 하다 고려 후기 지명이 김해로 바뀌자 본관을 김해로 부르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首露王) 계통의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혼돈됨에 따라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 김씨는 후김(後金)으로 구별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충의공(忠毅公) 김문기(金文起)의 명성이 크게 알려진 뒤 다른 김씨들이 김문기의 후손을 자칭하고 나서는 등 종통(宗統)을 어지럽히는 일이 잦았다. 이에 1849년(헌종 15) 경상도 유생 김주성(金周聲), 김근학(金根學), 김성현(金成鉉), 김치수(金致秀), 김홍환(金鴻煥) 등이 선조의 사실 목록에 진정서를 첨부하여 예조에 상소, 본래의 김녕을 본관으로 확정지었다고 한다.
고려 시대 평장사 김향(金珦), 병부 상서 김정병(金挺丙) 및 판도판서 김광저(金光儲) 등과 조선 시대 판서 김익생(金益生)·김윤달(金潤達)·김문기(金文起), 좌찬성 김인찬(金仁贊), 한성 판윤 김종남(金從南)·김응수(金應壽)와 방어사 김언공(金彦恭) 등을 배출하였다.
[입향 경위]
풍산면 두승리의 김녕 김씨는 김문기의 후예인 김복이 조선 후기 충청북도 영동에서 이곳으로 들어온 후 그 자손이 세거하고 있다. 적성면 지북리 지북 마을의 김녕 김씨도 조선 후기 김문기의 후예인 김집이 들어와 그 자손이 세거하고 있다. 지북 마을은 임진왜란 직후 당시 국부(國富) 소리를 듣던 참봉 양운거(楊雲擧)가 살았던 마을로 유명하다.
지북리를 옛날에는 갓대라고 하였다. 마을 형상이 갓[冠]과 대[帶] 모양을 하고 있어 이에 따른 것이다. 갓과 옥대는 부귀영화의 상징인데, 지북리의 뒷산과 마을을 감싸 흘러내리는 지맥이 갓과 대의 모양을 한 대명당이어서 양운거와 같은 큰 부자가 나왔다는 것이다. 양운거는 당시 전라 감영이 알아주는 부자였다. 『현종실록(顯宗實錄)』에 흉년이 들자 쌀 수백 석을 내어놓았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니 거부였음이 분명하다. 금과면 청룡리와 대성리에도 집성촌이 있으나 입향조나 입향 연대는 미상이다.
[현황]
2000년 현재 순창 지역 김녕 김씨는 187가구, 464명이 살고 있다. 1989년 순창군에서 실시한 인구 통계 자료에 따르면 당시 순창 지역 김녕 김씨는 풍산면 두승리 두지 마을에 70가구, 적성면 지북리 지북 마을에 32가구가 집성촌을 이루며 살고 있다. 또한 금과면 청룡리에 37가구, 대성리에 8가구가 살았으나 2010년 현재는 청룡리 18가구로 19가구가 줄어든 반면, 대성리는 대성 마을 6가구와 대각 마을 8가구를 합쳐 14가구로 6가구가 늘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