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9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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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楊以時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인·학자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정훈 |
[정의]
고려 후기 문관으로 남원 양씨 순창 입향조 양사보의 조부.
[가계]
본관은 남원(南原). 증조할아버지는 양국재(楊國財), 할아버지는 양윤보(楊允保), 아버지는 경덕재생(經德齋生)인 양서령(楊瑞齡)이다. 처는 문신 탁광무(卓光茂)의 딸 광산 탁씨이며, 아들은 양수생(楊首生), 손자는 양사보(楊思輔)이다.
양이시의 며느리이자 양수생의 부인인 숙인 이씨(淑人李氏)는 1379년(우왕 5) 시아버지와 남편을 한 해 사이에 모두 사별하였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이씨 부인은 얼마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양사보이다. 친정에서는 강력하게 개가를 권하였으나 이씨 부인은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며 시아버지와 남편의 홍패를 들고 남원 교룡산 아래 남편의 옛집으로 갔다. 이씨 부인이 남원에 내려와 자리를 잡자마자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운봉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이씨 부인은 양사보를 데리고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로 입향하여 이후 남원 양씨들이 순창에 터를 잡고 살게 되었다.
[활동 사항]
양이시(楊以時)는 1353년(공민왕 2) 생원시에 장원을 하였으며, 1355년(공민왕 4) 문과시에 동진사 10위로 급제하였다. 이후 국자감 학유(國子監學諭), 추밀원 지신사(樞密院知申事), 집현전 대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지신사 시절 공민왕의 명을 받고 우왕을 보살펴 기른 공이 커서, 우왕이 즉위한 뒤에 포상을 받기도 하였다. 당시의 석학인 목은(牧隱) 이색(李穡)이나 척약재(惕若齋) 김구용(金九容), 둔촌(遁村) 이집(李集) 등과 교유하였다. 1377년(우왕 3)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시문에 능하여 양이시의 시 4수가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으며, 명(明)나라의 오명제(吳明濟)가 편찬한 『조선 시선(朝鮮詩選)』에도 수록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양이시의 문과 급제 증표인 홍패(紅牌)와 아들 양수생(楊首生)의 홍패, 그 외 후손들의 문과 급제 교지 5매 등 총 7매가 ‘남원 양씨 종중 문서 일괄’이라는 명칭으로 보물 제725호로 지정되어 있다.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