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28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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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剛泉寺 |
이칭/별칭 | 강천사(江泉寺)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기관 단체/사찰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강천산길 270[청계리 996] |
시대 | 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배옥영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소속 사찰.
[개설]
산세가 용이 꼬리를 치며 승천할 형상이라 하여 용천사(龍泉寺)라고도 하였다. 선조(宣祖) 때 학자 귀봉(龜峰) 송익필(宋翼弼)이 이곳에 유숙하며 「숙강천사(宿剛泉寺)」라는 제목으로 시를 지었는데 이때부터 강천사(剛泉寺)로 불리었다 한다.
[건립 경위 및 변천]
887년(진성 여왕 1)에 도선 국사(道詵國師)가 불교의 전파를 위해 전국을 수행 다니던 중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청계리 광덕산(廣德山) 줄기에 호남의 금강산으로 천태만상(千態萬象)의 기암절벽과 굽이굽이 맑은 물이 사계절을 흐르는 천고(千古)의 빼어난 절경에 강천사[옛 이름은 복천사(福川寺, 福泉寺)]를 창건하였다.
당시에는 강천사를 중심으로 국가적으로는 호국 사상과 개인적인 기복 신앙 및 인과응보적 업설이 불교의 전생설과 습합(習合)되어 매우 빠르고 깊숙하게 뿌리내리고 있었다. 강천사에 소속된 암자로는 명적암(明寂庵)·연대암(蓮臺庵)·용대암(龍臺庵)·왕주암(王住庵)·지적암(智積庵)이 있었다. 특히 왕주암은 고려 왕 태조(太祖)[918~943년 재위]가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할 때 먼저 후백제(後百濟)를 견제하기 위하여 후방 요충지인 금성(錦城)[지금의 나주]을 점령한 일이 있었는데, 그 때에 태조가 이 절에서 머물렀던 일이 있었다. 이를 계기로 왕주사라 명명하게 되었다.
1316년(충숙왕 3) 덕현 선사(德賢禪師)가 오층 석탑과 12개의 암자를 창건하여 사세(寺勢)를 확장하였으며, 조선 시대 1482년(성종 13)에 작성된 「강천사 모연문」의 기록을 통해 강천사가 이 해에 신말주(申末舟)의 부인 설씨의 시주를 받아 중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후 강천사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불타 없어지게 되었으며, 1604년(선조 37)에 태능(太能) 소요 대사(逍遙大師)가 중창하면서 옛 위용을 갖추게 되었다. 1760년(영조 36) 경진판 『옥천 군지(玉川郡誌)』에 의하면 강천사는 불전이 3개소, 승방이 12개소이며, 명적암·용대암·연대암·왕주암·적지암 등 강천사에 속한 암자가 12개가 있었으며 그 당시 500여 수도승이 살던 대거찰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후 1855년(철종 6) 금용당(金容堂) 선사에 의해 중창되었으나 1950년 6·25 전쟁으로 인해 보광전, 칠성각, 첨성각의 당우가 모두 불탔다. 당시 강천사에는 비구니들이 주로 머물렀는데 그 까닭은 창건자 도선 국사의 “머리카락과 수염이 없는 사람이 있어야 빈찰(貧刹)이 부찰(富刹)로 되고 도량이 정화된다.”라는 예언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 후 승려 김장엽이 1959년에 새로 중창하였고, 1992년 보광전을 대웅전으로 바꾸었다.
[현황]
2014년 현재 강천사에는 대웅전, 관음전, 요사채 등이 있다.
[관련 문화재]
강천사 대웅전 앞마당에는 1316년(충숙왕 3)에 건립된 강천사 오층 석탑[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92호]이 있고, 강천사 오층 석탑의 북쪽 약 1m 지점에는 중대석과 보주(寶珠)만이 남아 있는 석등이 있다. 강천사 모과나무[전라북도 기념물 제97호]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300년 정도] 모과나무로 지금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으며 가을에 강천사를 찾는 사람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또한 강천사 앞 내를 건너 남쪽에는 순창 삼인대(淳昌三印臺)[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27호]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