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07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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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朝鮮勞動黨全北道黨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주철희 |
[정의]
6·25 전쟁 당시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에 있었던 북한군 유격대 사령부.
[설립 목적]
1950년 7월 20일 북한군이 전주에 입성하고 22일경 순창을 점령하였다. 인민군이 낙동강 경계선까지 전선을 확장하여 남진하였으나, 9월 15일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28일 서울이 수복되면서, 조선 노동당 각 도당 위원회에서는 9월 28일을 전후하여 모든 조직을 산악 지대로 이동하였다. 전라북도 순창 지역은 회문산 등 산악 지대가 많아 빨치산의 근거지가 되었다.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은 사령부를 회문산[여분산 금상골]에 두고 유격 활동을 총지휘하고자 하였다.
[변천]
1.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사령부 조직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이 회문산에 근거지를 두고 전북 유격대를 조직한 것도 이 시기이다.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사령부는 순창군 구림면 회문산에 자리 잡았다.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사령부는 사령관 방준표, 부사령관 조병화를 중심으로 7개의 직속 부대와 14개의 지역 유격대로 구성되었다.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사령관 방준표[1906~1954]는 경상남도 거제에서 태어나 대구 사범 학교를 졸업한 엘리트였다. 1950년 전라북도 유격대 사령관이 되었는데, 빨치산 투쟁 당시 조선 인민 유격대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李鉉相)의 남부군 활동에 대해 부정적이었으며 1951년 7월 조선 노동당의 남한 6개 도당 위원장 회의에서 이현상이 제시한 빨치산 부대의 개편안에 대해 빨치산 투쟁도 당이 지도해야 한다는 원칙과 중앙당의 명령이 없다는 이유로 전라남도 위원장 박영발(朴榮發)과 함께 반대하였다. 1954년 1월 덕유산에서 토벌대의 습격을 받고 생포되기 직전에 수류탄으로 자폭하였다. 부사령관 조병화는 6·25 전쟁 이전 함경북도당 조직 부장이었다. 1952년 지리산 뱀사골에서 체포되었으나 전향하지 않고 1954년 5월에 처형되었다.
입산 초기 전주에서 대피해온 도당 간부들을 중심으로 근방의 쌍치·구림·칠보·운암·팔덕·태인·강진·청웅 등 각 면의 민청원, 여맹원, 기타 기관원 등 300명이 초막을 지어 10여 명씩 조를 이루어 활동하였다.
2. 조직 개편
1951년 8월 남한 지구가 5개 지구당으로 개편되면서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은 제5 지구당에 소속되어 회문산 외곽에 배치되었다. 이때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은 병단 체제로 개편하였다. 회문산 남쪽 정면인 성미산 미륵정의 벼랑 일대는 백암의 벼락 병단이, 동쪽 정면 엽운산은 번개 병단과 카투사 병단이, 후방부가 있는 북쪽 히여터 방면은 탱크 병단이, 서북면은 독수리 병단과 독립 중대격인 임실군당 유격대가 담당하였다. 남해 연단 잔류병으로 된 기포 병단은 예비가 되어 필요에 따라 출동했고, 도 사령부 직속으로 보위 병단이 있어 외곽 방위선이 뚫리는 경우라도 도 사령부를 호위하도록 하였다. 각 병단의 병력은 일정치 않으나 대체로 100여 명 안팎이었고 번개 병단은 200명이 넘었다.
[주요 사업과 업무(활동 사항)]
장군봉 북쪽 기슭인 히여터 부락에는 후방부와 야전 병원이 있었다. 회문산 자락 안시내 골짜기에서 생산된 창호지로 당보인 『전북도당 통신』을 발간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빨치산을 교육시키기 위해 도당 차원에서 1951년 초에 당학교인 노령 학원을 설립하였다.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은 1955년 7월 13일 제1 유격 지도부가 소멸될 때까지 순창 지역의 회문산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은 회문산을 끼고 활동하면서 순창 지역에 많은 피해를 주었다. 현재 회문산에는 6·25 전쟁 양민 희생자 위령탑이 있으며, 비목제가 열리고 있다. 최근에 회문산에는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과 노령 학원과 비트 등 빨치산 사령부 시설을 마련하여 교육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이 거점으로 활동했던 순창 지역의 회문산은 빨치산 연구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