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21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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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梁應鼎 |
이칭/별칭 | 공섭(公燮),송천(松川)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최영성 |
[정의]
조선 전기 순창 군수를 지낸 문관.
[가계]
본관은 제주(濟州). 자는 공섭(公燮), 호는 송천(松川). 증조할아버지는 양담(梁湛), 할아버지는 양이하(梁以河), 아버지는 교리 양팽손(梁彭孫)이다. 어머니는 금산 김씨(錦山金氏)로 김섬(金銛)의 딸이다. 형은 동래 부사를 지낸 양응태(梁應台)이고, 의병장을 지낸 양산숙(梁山璹)이 셋째 아들이다.
[활동 사항]
양응정(梁應鼎)[1519~1581]은 1519년(중종 14) 전라도 능주(綾州) 월곡리(月谷里)에서 태어났다. 김인후(金麟厚)·임억령(林億齡)·이안눌(李安訥) 등과 교유하였고, 정철(鄭澈)·백광훈(白光勳) 등이 스승으로 섬겼다. 1540년(중종 35) 생원시에 장원 급제하고, 1552년(명종 7) 식년 문과 을과에 급제하여 검열(檢閱) 등을 지냈다. 1556년 병조 좌랑으로 문과 중시(重試)에서 장원 급제하여, 호당(湖堂)[독서당]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그 이듬해 공조 좌랑으로 있을 때 당시 권신이었던 윤원형(尹元衡)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하였다가 1560년(명종 15)에 복직되었다.
1563년 순창 군수에 부임하였다가 1565년 홍문관 수찬(修撰)으로 영전하였다. 이후 광주 목사, 진주 목사를 거쳐 1571년(선조 4) 경주 부윤이 되어 1574년까지 재임하다가 진주 목사 재직 당시 청렴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1576년에 의주 부윤으로 기용되었고, 이듬해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대사성이 되었다. 이후 벼슬에 나가지 않고 경전 연구와 생도·자제 교수에 전념하다가 1581년(선조 14) 세상을 떠났다. 세 아들을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게 하였다.
[학문과 저술]
시문에 능하여 선조 때 8문장의 한 사람으로 뽑혔으며, 저서로 『송천 유집(松川遺集)』·『용성 창수록(龍城唱酬錄)』이 있다.
[묘소]
양응정의 묘소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동호동에 있으며,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8호로 지정되었다.
[상훈과 추모]
효행으로 정문이 세워졌다. 1631년(인조 9) 아들 양산숙이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자 추은(推恩)을 입어 예조 참판에 증직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