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6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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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鎔觀 |
영어음역 | An Yonggwan |
이칭/별칭 | 용관(鎔觀),국사(菊史),만오(晩晤)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정명리 신곡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전인식 |
[정의]
일제강점기 경상북도 울진 출신의 독립운동가.
[가계]
본관은 순흥(順興). 휘는 용관(鎔觀), 자는 국사(菊史), 호는 만오(晩晤). 문정공(文貞公) 안축(安軸)의 24대손이다. 아버지는 안항선(安恒善), 어머니는 장감호(張甘湖)이다.
[활동사항]
『농민삼천리(農民三千里)』 등의 잡지를 펴내어 농촌 계몽에 힘썼다. 또한 일본제국주의를 응징하고자 동지를 모아 국권 회복을 주창하며 은밀히 동분서주하다가 1935년 21세에 왜경에게 체포되어 잔혹한 심문과 모진 고문을 당했다. 치안유지위반죄 및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함흥지방법원에서 1년 징역형을 선고 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경성복심법원에 상고하였으나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
1년 뒤 서대문형무소에서 만기 출옥하였으나 감시당하는 생활이 너무 불안하여 일월산(日月山)에 입산하여 정양하였다. 1940년 고향 선배인 안규원(安奎源)·황병문(黃炳文) 등과 합류하여 동지를 규합하고 조국의 독립을 앞당기기 위해 힘썼다.
1945년 8월 15일 광복이 되자 울진군건국준비위원(蔚珍郡建國準備委員)으로서 일본 군대와 경찰을 무장 해제하고 그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는 등 치안 유지에 진력하였다. 그 후 지역 사회 발전과 의료 개선을 위해 한의사로서 많은 연구와 인술(仁術)을 베풀었다. 1962년 9월 15일 옥살이 고문의 여독으로 향년 50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농촌 계몽을 목적으로 잡지 『농민삼천리』를 펴내었다.
[상훈과 추모]
1983년 8월 30일 애국지사 추서 및 포상이 있었고, 1984년 10월 묘역 단장을 위한 자금이 지원되어 묘역을 깨끗하게 정리하였다. 1986년 5월 30일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정명리에 ‘애국지사안용관추모비(愛國志士安鎔觀追慕碑)’가 세워졌다. 199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