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1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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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安鎔觀追慕碑 |
영어의미역 | Memorial Stone for An Yonggwan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정명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인표 |
성격 | 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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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986년 5월 30일 |
관련인물 | 안용관 |
재질 | 화강암 |
높이 | 180㎝ |
너비 | 51㎝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정명리 |
소유자 | 순흥안씨 문중 |
[정의]
1986년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정명리에 건립된 안용관의 독립운동을 기리는 비.
[건립경위]
안용관의 독립운동이 국가로부터 인정을 받아 1983년 8월 30일 애국지사로 추서되어 포상이 있었고, 1984년 10월에는 국가의 지원으로 묘역이 정비되었다. 이러한 안용관의 애국심을 기리고, 후세 교육의 장을 마련하고자 지역 인사들이 안용관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성금을 모아 1986년 5월 30일에 건립하였다
[위치]
경상북도 울진군 기성면 정명리에서 평해 방면 척산천변에 있다. 동쪽으로 국도 7호선이 지나고 있으며, 인근에 기성초등학교와 기성면사무소가 자리하고 있다. 동남쪽으로 약 1.5㎞ 거리에 울진공항이 있으며, 봉산리·척산리·다천리 등과 접하고 있다.
[형태]
추모비는 기단, 비좌, 비신, 이수를 갖추고 있다. 화강암으로 제작한 2단의 기단 위에 비좌를 두고 비신을 고정하였다. 추모비의 둘레에는 석재와 스테인레스 강으로 낮은 난간을 둘렀으며, 안용관의 행적에 대하여 새긴 석판과 추모비 건립과 관련된 내용을 새긴 석판을 함께 세워 놓았다. 추모비의 높이는 180㎝, 너비 51㎝, 두께 24㎝이다.
[금석문]
비신의 앞면에 “애국지사안용관추모비(愛國志士安鎔觀追慕碑)”라고 새겼으며, 뒷면과 옆면에는 안용관의 행적과 추모비 건립 주체, 건립 연대 등을 기록하고 있다. 뒷면의 안용관 행적에 대한 비문은 다음과 같다.
“애국지사 안용관(安鎔觀)은 우리 민족독립정신의 원동력인 3·1정신을 이어받아 일제(日帝)의 고압적 탄압을 무릅쓰고 줄기차게 독립운동선상에서 성스럽고 일편(一片) 마음씨로 나라 사랑하였으니 이에 그 기적(奇蹟)을 비(碑)돌에 새겨 청사(靑史)에 남기려니, 지사(志士)는 어린 시절부터 초범(超凡)한 천성(天性)으로 가난을 견디어 절조하며 매사에 확신함과 영민(英敏)한 성격으로 서기 1915년 10월 13일 기성면(箕城面) 정명리(正明里) 신곡동(薪谷洞)에서 태어났다. 휘(諱)는 용관(鎔觀) 자는 국사(菊史) 호는 만오(晩晤)요 순흥인(順興人) 문정공(文貞公) 24세손으로 부는 항선(恒善) 모는 장감호(張甘湖)이다. 매화공립보통학교(梅花公立普通學校)를 졸업하고 문장(文章)이 널리 알려졌으며 효심이 또한 지극하다. 독학(獨學)으로 세계(世界) 경사를 익히며 농민삼천리(農民三千里) 제목 잡지(雜誌) 등을 인쇄하여 농촌의 궁한 생활을 개탄하며 일본제국주의(日本帝國主義)에 대하여 구국웅지(救國雄志)를 품고 동지를 규합하여 국권회복(國權回復)할 것을 주창(主唱) 은밀히 동분서주하다가 21세의 약관의 몸으로 왜경(倭警)에게 체포되여 극악무도한 신문(訊問)과 모진 고문에 굴하지 않고 오직 일제(日帝)식민지통치체제를 반항하다가 치안(治安)유지위반죄 및 일본천황불경죄명(日本天皇不敬罪名)으로 함흥지방법원(咸興地方法院) 판결에 1년 징역(懲役) 언도를 받고 이에 불복(不服) 경성복심법원(京城覆審法院)에 상고(上告)하였으나 조선총독부 판사(判事) 심리에서 본건은 이유없다 하여 기각처리되여 1년 징역이 확정되어 서울 서대문형무소(西大門刑務所)에서 만기출옥(滿期出獄) 후 요시찰감시생활(要視察監視生活)이 너무 불안하여 일월산(日月山)에 입산하여 정양하였다. 1940년 단신(單身)으로 도만(渡滿)하여 고향 선배인 안규원(安奎源) 황병문(黃炳文)씨 등 독립투사와 합류(合流)하여 동지(同志)를 규합 확대하던 사이 2차 세계전쟁(世界戰爭)의 종말을 앞두고 1942년 귀국하여 향토에서 수신(修身) 중 환희의 광복을 맞아 지사는 울진군건국준비위원(蔚珍郡建國準備委員)으로 일본군경(日本軍警) 무장해제(武裝解除)와 그들을 일본으로 돌려보내는 등 치안유지에 진력하고 지방자치에 공을 남기셨다. 그 후 지역사회 도움과 여러 사람이 은연중 갈망하는 건강을 생각하고 특히 이 고장 의료 취약점을 생각하여 많은 연구와 인술(仁術)을 베푸시니 그 공이 지대하였다. 지사는 항일 옥살이 고문의 여독(餘毒)으로 1962년 9월 15일 50세로 파란많은 일생을 마치시니 아! 애석하도다. 지사의 자주독립에 헌신(獻身)한 항일공로(抗日功勞)를 찬양하여 1983년 8월 30일자로 대통령께서 애국지사 추서(追敍) 및 포상이 있었고 1984년 10월에는 묘역(墓域) 단장금이 지원되어 묘역마져 깨끗하게 정리되어 지하(地下)의 지사는 웃음으로 평화 속에 지나오리. 우리 고장이 낳은 지사의 숭고(崇高)한 애국정신의 얼을 추모(追慕)하고 후세 교육에 본이 되기 위하여 뜻있는 동지(同志)로 하여금 추모비건립추진위원회(追慕碑建立推進委員會)를 구성하고 각계 각층의 성금으로 이 자리에 추모비를 건립하다.
춘하추동/ 사시절은/ 정함없이/ 만오비에/ 들려주고/ 한 평생의/ 애국기혼/ 오래오래/ 전해주리/ 태양빛은/ 언제라도/ 추모비를/ 비쳐주고/ 민답심은/ 님의기상/ 기리기리/ 빛나오.”
[현황]
안용관 추모비가 건립된 지 오래되지 않았고, 순흥안씨 문중에서 관심을 두고 지속적으로 관리하고 있어 보존 상태가 매우 좋다.
[의의와 평가]
안용관의 독립운동은 순흥안씨 문중의 자랑일 뿐만 아니라 울진군민 전체가 자긍심을 가지게 하였다. 이러한 안용관의 독립운동에 대한 행적을 정리하고, 지역 주민들의 성금을 모아 추모비를 건립하였다는데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