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063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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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吳蒙乙 |
영어공식명칭 | Oh Mongeul |
분야 | 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일임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박노석 |
[정의]
조선 전기 전라북도 완주군 소양면 일임리에 무덤이 있는 관인.
[가계]
오몽을(吳蒙乙)[?~1398]의 본관은 보성(寶城)이다. 보성오씨는 윤관과 함께 여진족을 토벌해서 동북9성을 개척하는 데 공을 세운 오연총(吳延寵)을 시조로 한다. 오몽을은 중시조 오현필(吳賢弼)의 11대손이다. 고조할아버지는 오예충(吳禮忠)이며 예부상서를 지냈고, 증조할아버지는 오윤정(吳允貞)으로 문하찬성사를 지냈다. 할아버지는 오백(吳栢)으로 호부상서를 지냈으며, 아버지는 오예(吳豫)로 소부감영경연(小府監領經筵)을 역임했다. 어머니는 숙신택주(淑信宅主) 부유심씨(富有沈氏)이다. 부유심씨는 네 아들을 낳았다. 첫째는 오천을(吳天乙)로 대제학을 지냈고, 둘째는 오충을(吳忠乙)로서 찬성을 지냈으며, 넷째는 오신을(吳信乙)로 소부감령(少府監令)병마사를 지냈다. 오몽을은 이들 중 셋째이다. 부인은 전주최씨 안렴사공 최용생(崔龍生)의 딸이다.
오몽을은 두 명의 아들이 있는데, 장남은 오소남(吳召男)으로 어모장군을 지냈으며, 둘째는 오자경(吳子慶)으로 세조의 즉위에 공을 세워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되었고, 1467년(세조 13)에 종실 귀성군 이준(李浚), 창녕부원군 조석문(曺錫文) 등과 함께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토평해서 정충적개공신에 녹훈되었으며 보산군에 봉해지고 시호는 양무(襄武)이다. 오소남은 사재 벼슬을 지낸 진주 유용생(柳龍生)의 딸에 장가들어 2남 1녀를 낳았다. 오소남의 장남 오효면(吳孝綿)은 어모장군을 지냈고, 차남 오효문(吳孝文)은 아들이 없었으며, 딸은 송원년(宋元年)과 결혼했다. 오자경은 천안 전자원(全自元)의 딸에게 장가들어 4남 1녀를 낳았다. 오자경의 장남은 오연순(吳延純)으로 공조참판을 역임했고, 조양군에 봉해졌으며, 차남은 오연찰로 공조판서와 예문제학을 지냈고, 셋째는 오방찰(吳邦札), 넷째는 오계찰(吳季札)인데 모두 아들이 없었다. 딸은 예안이씨 이성간(李成幹)에게 시집갔는데 이성간은 정국원종공신으로 사직을 지냈다. 현재 오몽을의 자손들은 충청도 지역에 주로 거주하고 있다.
[활동 사항]
오몽을은 나면서부터 영특하고 민첩했으며, 성장하면서 더욱 특출났다. 성품이 관대하고 공평하며 계책이 정밀해 능히 때로 본 사실을 말하지 않을 줄 알았다. 사물을 처리하는 것이 대부분 사람이 예상하지 못했던 데까지 나갔다. 과거를 보기 전에 일찍이 시를 지어 말하기를 ‘한가한 이 나 같은 사람 없을 걸세. 일찍이 단 한 가지 한 일 없네. 성의 동쪽으로 적은 비 지나가니 어느새 봄 되어 꽃 심을 때’라 하였다. 1380년(우왕 6)에 생원으로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고 고려 말에 관직이 대장군에 이르렀다. 1392년 태조 이성계(李成桂)를 추대하는 데 공을 세워 개국공신 1등에 책록되어, 1392년 9월에 150결의 공신전과 노비 15구를 받았다. 1394년(태조 3) 고려의 왕씨(王氏) 일족을 제거하기 위해 왕씨들을 삼척과 강화도, 거제도 등 해도에 유배시켰다. 이때 대장군으로 있던 오몽을은 형조전서(刑曹典書) 윤방경(尹邦慶)과 함께 강화에 유배하는 책임을 맡았다. 1396년(태조 5)에 중추원에 있던 8인을 서북면의 수령을 겸하게 했는데, 이때 오몽을은 연산부(延山府)[영변]의 수령을 겸직했다. 1397년(태조 6)에 강원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1398년(태조 7) 보성군(寶城君)에 봉해졌다.
오몽을은 심효생, 정도전 등과 함께 강씨의 소생인 이방석(李芳碩)을 세자로 책봉하고 왕위를 계승하게 하려고 했다. 1398년에 이방원이 중심이 되어 정도전 등을 제거하는 과정에 오몽을과 심효생도 체포되어, 8월 26일에 순군옥(巡軍獄)에 투옥되었다가 이산진(伊山鎭)으로 유배되었다. 9월 21일에 임금이 내린 임명 사령장인 사첩(謝帖)이 몰수되고 토지와 노비가 국가에 환수되었으며, 10월 10일에 사형을 당했다. 죄명은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해 서얼 왕자인 이방석을 왕세자로 세우고 종친을 해치려 했다는 것이다. 1409년(태종 9) 12월 19일에는 녹권(祿券)이 추탈되고, 토전(土田)과 노비가 몰수되었다. 1422년(세종 4) 윤 12월 8일에 정도전(鄭道傳), 심효생(沈孝生), 오몽을(吳蒙乙), 이근(李懃), 장지화(張志和), 손흥종(孫興宗), 이제(李濟), 이거이(李居易), 황거정(黃居正) 등의 공신영자(功臣影子)를 자손에게 돌려주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보성군 인물 조에 오몽을에 대해서 “고려 말년에 과거에 뽑혀 본조의 개국공신(開國功臣)이 되었고 벼슬이 이품(二品)에 이르렀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묘소]
오몽을의 묘소는 완주군 소양면 일임리 일임마을 뒷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