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300877 |
---|---|
한자 | 許穆 |
이칭/별칭 | 문보(文父),화보(和父),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삼고(三古)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기도 양주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창래 |
출생 시기/일시 | 1595년 - 허목 출생 |
---|---|
활동 시기/일시 | 1624년 - 광주 자봉산으로 이주 |
활동 시기/일시 | 1650년 - 정릉 참봉, 「상례편(喪禮篇)」 저술 |
활동 시기/일시 | 1651년 - 내시 교관, 조지서 별좌, 공조 좌랑 |
활동 시기/일시 | 1657년 - 공조 정랑, 지평 |
활동 시기/일시 | 1659년 - 장령 |
활동 시기/일시 | 1660년 - 삼척 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674년 - 대사헌 |
활동 시기/일시 | 1675년 - 이조 참판, 비국 당상, 귀후서 제조,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겸 성균관 제조, 이조 판서, 우의정 |
활동 시기/일시 | 1676년 - 사직 |
활동 시기/일시 | 1678년 - 판중추부사 |
활동 시기/일시 | 1680년 - 관직삭탈 |
몰년 시기/일시 | 1682년 - 허목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688년 - 신원, 관작 회복 |
추모 시기/일시 | 1690년 - 나주 미천서원에 배향됨 |
추모 시기/일시 | 1691년 - 연천 미강서원에 배향됨 |
출생지 | 창선방 - 서울특별시 종로구 명륜동 |
거주|이주지 | 광주 자봉산 - 경기도 광주시 |
거주|이주지 | 영동 - 충청북도 영동군 |
거주|이주지 | 강릉 - 강원도 강릉시 |
거주|이주지 | 원주 - 강원도 원주시 |
거주|이주지 | 상주 - 경상북도 상주시 |
거주|이주지 | 의령 모의촌 - 경상남도 의령군 |
거주|이주지 | 사천 - 경상남도 사천시 |
거주|이주지 | 연천 - 경기도 연천군 |
묘소|단소 | 허목 묘 -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90 |
사당|배향지 | 미천서원 - 전라남도 나주시 안창동 |
사당|배향지 | 미강서원 - 경기도 연천군 미산면 동이리 |
암각문 |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로376번길[삼하리 산65]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양천 |
대표 관직 | 우의정 |
[정의]
경기도 양주시에 암각문이 있는 조선 후기의 문신.
[가계]
본관은 양천. 자는 문보(文父)·화보(和父), 호는 미수(眉叟)·대령노인(臺嶺老人). 증조할아버지는 의정부 찬성 허자(許磁)이고, 할아버지는 별제 허강(許橿)이며, 아버지는 연천 현감 허교(許喬)이다. 어머니는 나주 임씨로 정랑 임제(林悌)의 딸이다. 부인은 전주 이씨로 영의정 이원익(李元翼)의 손녀이다.
[활동 사항]
허목(許穆)[1595~1682]은 1615년(광해군 7) 정언눌(鄭彦訥)에게 글을 배우고, 1617년(광해군 9) 거창 현감으로 나가는 아버지를 따라가서 문위(文緯)[1554~1631]에게 사사하였다. 문위의 소개로 사촌 형 허후(許厚)와 함께 남명(南冥) 조식(曺植)의 제자이며 영남 남인파의 거두인 정구(鄭逑)[1543~1620]를 찾아가 스승으로 섬겼다.
1626년(인조 4) 동학(東學)[한양 동쪽에 있었던 사립 교육 기관]에서 공부할 때 유생 박지계(朴知誡)가 인조의 생모 계운궁 구씨(啓運宮具氏)의 복상(服喪) 문제와 관련하여 추숭론(追崇論)을 주장하자 학생 임원이던 허목은 ‘임금의 뜻에 영합하여 예를 어지럽힌다’며 유벌(儒罰)을 가하였다. 이에 임금이 괘씸하게 여겨 과거 응시를 금하는 벌을 내렸다. 후에 벌이 풀렸으나 과거를 치르지 않고 경기도 광주 자봉산으로 이사해 학문에 전념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영동으로 피난하였다가 이듬해 강릉, 원주를 거쳐 상주로 갔고, 1638년(인조 16)부터는 의령의 모의촌(慕義村)에서 살았다. 1641년(인조 19) 사천으로 옮긴 뒤 창원, 칠원 등을 거쳐 1646년(인조 24) 고향인 경기도 연천으로 갔다.
1647년(인조 25) 어머니 상을 당하여 상중에 『경례유찬(經禮類纂)』을 쓰기 시작하여 3년 뒤 상례편(喪禮篇)을 완성하였다. 1650년(효종 1) 정릉 참봉에 제수되었으나 1개월 만에 사임하였다. 이듬해 내시 교관, 조지서 별좌, 공조 좌랑을 지냈고, 용궁 현감에 임명되었지만 가지 않았다. 1657년(효종 8) 공조 정랑에 이어 지평이 되었다. 이때 군주가 갖춰야 할 덕과 여러 가지 폐단을 적은 상소문을 올린 후 사임을 청하였다. 이후 사복시 주부로 옮겼다가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1659년(효종 10) 장령이 되어 또 다시 군덕(君德)에 대한 소를 올렸으며, 송시열(宋時烈), 송준길(宋浚吉) 등이 추진하던 북벌 정책을 신중히 검토해야 한다는 내용의 「옥궤명(玉几銘)」을 지어 바쳤다. 둔전(屯田)[군과 관아에 속한 토지]의 폐단도 알렸다. 그해 효종이 죽자 상례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
장악원 정에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660년(현종 1) 경연(經筵)[임금이 신하들과 학문을 토론하고 정치를 논하는 일]에 참가하였다. 장령이 되어서는 “효종에 대한 조대비(趙大妃)의 상복 착용 기간이 잘못되었으니 이를 바로잡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려 정계에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것을 기해복제(己亥服制)라 한다. 이 논쟁으로 조정이 시끄러워지자 임금은 허목을 삼척 부사로 보냈다.
삼척에 머물 때는 향약을 만들어 백성의 교화에 힘썼다. 『척주지(陟州誌)』를 편찬하고, 「정체전중설(正體傳重說)」을 지어 ‘복상 삼년설’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하였다. 1674년(숙종 즉위년) 효종의 비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의 상복 문제가 다시 불거져 정치 싸움으로 번졌다. 그 결과 서인이 실각하고 남인이 집권하였다. 허목은 1674년 임금의 특명으로 대사헌에 임명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직을 청하였다.
1675년(숙종 1) 이조 참판, 비국 당상, 귀후서 제조, 자헌대부, 의정부 우참찬 겸 성균관 제조, 이조판서를 거쳐 우의정에 올라 과거를 거치지 않고 삼공(三公)이 되는 기록을 세웠다. 같은 해 덕원에 유배 중이던 송시열의 처벌을 둘러싸고 같은 남인끼리 영의정 허적(許積)은 용서를, 허목은 엄벌에 처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남인이 온건파[탁남]와 강경파[청남]로 갈라지는 원인이 되었다. 허목은 또 지덕사(至德祠)[양녕대군(讓寧大君)의 사당] 창건을 건의하였고, 체부(體府),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 지패법(紙牌法), 축성(築城) 등을 반대하였다.
1675년 임금으로부터 궤장(几杖)[나라에 공이 많은 70세 이상의 대신에게 내리던 궤(几)와 지팡이]을 하사 받았다. 이듬해 사임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허락하지 않아 성묘를 핑계로 고향에 내려갔다가 대비의 병환 소식을 듣고 입궐하였다. 얼마 후 특명으로 기로소 당상이 되었는데, 음관(蔭官)으로 기로소에 들어간 것은 일종의 특례였다. 1677년(숙종 3) 비변사 폐지, 북벌 준비를 위한 체부 설치, 재정 보전책으로 호포법 실시 등을 주장한 윤휴(尹鑴)에 맞서 반대 상소를 올렸다.
1678년(숙종 4) 판중추부사 자리를 내놓고 경기도 연천으로 내려가 저술과 후진 양성에 힘썼다. 이때 나라에서 집을 지어 주었는데, 허목은 이 집을 은거당(恩居堂)이라고 명명하였다. 1679년(숙종 5) 강화도에서 ‘투서의 역변’이 일어나자 조정에 나가 영의정 허적의 전횡을 비난하는 소를 올리고 다시 낙향하였다. 1680년 경신대출척 때 남인이 실각하고 서인이 집권하면서 관작을 삭탈당했으며, 2년 뒤인 1682년에 세상을 떠났다. 1688년 신원되고 관작이 회복되었다.
[학문과 저술]
사상적으로 이황(李滉), 정구의 학통을 물려받아 이익(李瀷)에게 전수함으로써 남인 실학파의 기반을 닦았다. 사서(四書)인 『대학(大學)』, 『논어(論語)』, 『맹자(孟子)』, 『중용(中庸)』이나 주희(朱熹)의 해설서가 아니라 초기의 유학 경서인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춘추(春秋)』, 『예기(禮記)』 등 오경(五經)을 탐구하고, 제자백가(諸子百家) 및 경서를 깊이 파고들어 예학에 일가를 이루었다. 이 때문에 허목은 학·문·서의 ‘삼고(三古)’로 불렸다. 글씨는 전서에 특별히 뛰어나 ‘동방 제1인자’라는 찬사를 받았다.
글씨로는 삼척의 척주동해비(陟州東海碑), 시흥의 영상이원익비(領相李元翼碑), 파주의 이성중표문(李誠中表文)이 있고, 그림으로 「묵죽도(墨竹圖)」가 전한다. 저서로는 『동사(東事)』, 『방국왕조례(邦國王朝禮)』, 『경설(經說)』, 『경례유찬(經禮類纂)』, 『기언(記言)』[흔히 『미수기언』으로 통칭함]이 있다. 『기언』에 실린 「심학도(心學圖)」와 「요순우전수심법도(堯舜禹傳授心法圖)」는 숙종 초에 대사헌으로 특별 임명되었을 때 왕에게 올린 것인데, 유학의 이기론(理氣論)을 도해(圖解)로 해석한 것이다.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삼하리에 허목의 암각문이 있다. 북한산 북쪽 자락인 노고산 중턱 곡릉천의 암반에 ‘미수선생장리지소(眉壽先生杖履之所)’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허목이 1658년(효종 9) 이곳에 놀러 왔다가 새긴 것으로 보인다. 허목의 글씨 외에도 이곳에는 김정희(金正喜)가 쓴 ‘몽재(夢齋)’, 허목의 후배 이시선(李時善)의 ‘독재동(篤才洞)’, ‘유마폭(流磨瀑)’, ‘충서근(忠恕勤)’, ‘가탁천(可濯泉)’, ‘만의와(萬懿窩)’ 등의 글씨가 거대한 바위 여기저기에 새겨져 있다.
[묘소]
무덤은 민간인 출입 통제 구역인 경기도 연천군 왕징면 강서리 산90번지에 있다. 봉분 앞에 묘비가 있는데 뒷면에 ‘허미수자명(許眉叟自銘)’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것으로 보아 생전에 스스로 쓴 것으로 보인다.
묘역에서 동쪽으로 500m 거리에 허목이 살았던 은거당이 있었다. 은거당에는 늘 푸른 나무 10종이 있어 ‘십청원(十靑園)’으로 불렸다는 정원과 기이한 돌로 꾸민 괴석원이 있었다고 전한다. 6·25 전쟁 때 불타 버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다. 허련(許鍊)이 그린 「십청원도(十靑園圖)」에 그 모습이 담겨 있다.
[상훈과 추모]
문정(文正) 시호를 받았다. 1688년(숙종 14)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관작을 회복시켰으며, 자손의 과거 등용을 허락하고 문집을 간행하게 하였다.
1691년(숙종 17) 허목의 신위를 봉안하는 미강서원(嵋江書院)이 마전군(麻田郡)[경기도 연천군]에 세워졌고, 삼척 경행서원(景行書院), 나주 미천서원(眉川書院), 창원 회원서원(檜原書院)에도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