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01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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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佛敎建築 |
영어의미역 | Buddhist Architecture |
분야 | 종교/불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채상식 |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부처의 유골이나 불상을 안치하고 예불을 드리기 위해 세운 구조물.
[개설]
경상남도 양산시의 불교건축은 그 대표격이라 할 수 있는 통도사의 대웅전과 금강계단을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이중 대웅전은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불전으로, 1997년 1월 1일자로 국보 제290호로 지정되었다. 현존하는 유물들은 자장율사가 처음 세운 당시의 것은 아니고 임진왜란 후에 조성한 것이지만, 처음 세웠을 때의 흔적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조선 후기 최고 수준의 불교건축물이라 할 수 있다.
[통도사 대웅전]
통도사의 가람 건축은 지형상 동서향으로 자리잡았기 때문에 법당들도 대부분 동서 방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대웅전은 남향으로 세워졌으며, 뒷면에는 금강계단 이 자라잡고 있다. 대웅전은 원래 석가모니를 모시는 불당인데, 통도사의 대웅전에는 따로 불상이나 탱화를 두지 않았다. 자장율사가 당에서 가져온 석가의 진신사리를 모신 금강계단을 대웅전 뒤쪽에 설치하였기 때문이다.
이곳의 진신사리는 대웅전 북쪽의 금강계단에 모셔졌으므로 대웅전은 부처가 없는 배전(拜殿)의 기능만을 갖고 있다. 내부에는 북쪽에 동서로 길게 불단(佛壇)이 있고, 그 앞쪽 중앙에 설법상(說法床)이 있어 대덕승려(大德僧侶)가 설법할 때 사용한다. 그러므로 신앙적인 면에서나 구조적인 면에서나 우리나라 불교건축에서 보기 드문 독특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
대웅전은 정면 3칸, 측면 5칸의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지붕의 형태는 금강계단과의 관계상 남쪽을 정면으로 할 필요가 있어, 용마루가 정면을 향하여 ‘丁’자형으로 구성된 보기 드문 형식이다. 내부 천장에 모란·국화 문양을 단청으로 하여 매우 화려하고 장엄한 분위기를 자아낸다. 건물 각 면에 걸린 현판 내용도 모두 다르다. 동쪽 적멸보궁, 서쪽 대웅전, 남쪽 금강계단, 북쪽 대방광전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건물 구조 형식을 보면 공포(栱包)는 다포식(多包式)으로 밖으로 삼출목(三出目), 내부는 사출목(四出目)이며, 기둥 사이에는 각각 공간포를 하나씩 배치하였으나 정면의 중앙에는 2개를 배치하였다. 특수한 ‘丁 ’자형의 지붕을 구성하는 데 있어서 가구재(架構材)들은 우선 남쪽 전면에서 세어서 제2·3·4주열(柱列)에 대량(大樑)을 각각 동서 방향으로 걸치게 하여 3개를 배치하였다.
그런 다음 다시 제4주열의 대량에서 북쪽 후면의 벽주(壁柱)에 걸쳐 직각이 되도록 2개의 대량을 더 배치하였다. 이 대들보를 받치기 위하여 건물 내부에는 서편에 기둥 3개를 한 줄로 세웠고, 또 4주열에는 동편에도 또 1개를 세웠으므로 도합 4개의 옥내 기둥이 ‘역기역’, 즉 ‘「’ 형으로 배열되어 있다.
동서와 남북 방향으로 배치된 5개의 대량 위에는 전부가 동일하게 중종량(中宗樑)과 종량(宗樑)을 각각 삼중으로 얹어서 상부 가구재를 구성하였으며, 그것들에게 의지해서 우물천정을 가설(架設)하였는데 매우 장엄하고 화려하다. 건물의 외부 기단(基壇)은 통일신라시대의 석조 기단과 동일한 형식의 구조이며, 돌의 면마다 뛰어난 연꽃조각을 볼 수 있다. 건물의 기단은 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1961년 7월에 대웅전 보수공사가 실시되었는데 그때 동편 합합(合閤)머리의 서까래 3개에서 다음과 같이 4행으로 종서(縱書)한 묵서명(墨書銘)이 발견되었다. “순치이년갑신오월십일월입주/동년팔월초십일상량/동년팔월십팔일일연/장공이십여명 상량후십사명조련자(順治二年甲申五月十日月立柱/同年八月初十日上樑/同年八月十八日日椽/匠工二十余名 上樑後十四名造鍊者).”
여기서 순치(順治) 2년은 1645년(인조 23)에 해당되기 때문에 이 묵서명을 통해 통도사 대웅전은 임진왜란 때 불타버린 것을 임진왜란 후에 재건축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우운대사(友雲大師)가 중건한, 건립 연대가 확실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건축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곧 이 건물은 조선 중기 불교건축의 특수형으로 목조건축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금강계단]
금강계단은 부처님의 사리를 모신 곳으로 일종의 사리탑이며, 부처님 진신사리의 전래 및 계단의 축조 경위는 『삼국유사(三國遺事)』 권3, 탑상 제4 전후소장사리(前後所將舍利)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계단의 모양을 “계단에는 단이 2층으로 되었는데, 위층 가운데에는 솥을 엎어놓은 것과 같은 돌뚜껑을 안치하였다.”라고 서술한 대목이 주목된다. 자장율사가 처음 설립했을 때의 모양인지, 아니면 일연이 『삼국유사』를 서술할 당시의 모양인지는 알 수 없다. 어떻든 현재의 석종형과는 모양이 달랐음을 짐작할 수 있다.
계단은 계(戒)를 수여하는 의식이 행해지는 장소로, 석가모니가 비구들의 수계의식을 집행하기 위해 기원정사 동남쪽에 단을 세우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금강계단은 금강과 같이 단단하고 보배로운 규범이란 뜻이다. 부처님이 항상 그곳에 있다는 상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통도사가 신라의 계율 근본 도량으로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부처님의 진신사리가 모셔진 금강계단에서 계를 받는 것이 곧 부처님으로부터 직접 계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의미를 갖기 때문이었다. 계단 가운데 종 모양의 석조물을 설치하여 사리를 보관하고 있다.
고려 말부터 왜구에 의해 이곳 사리를 약탈하려는 기도가 여러 번 있어 개성·금강산 등지로 옮겨 다니기도 하였다. 그리고 임진왜란 때는 통도사가 거의 전소하면서 본래 모습을 많이 잃은 것으로 보인다. 곧 지금 있는 계단은 고려·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차례 수리하였고, 그때마다 모습이 변하여 원래의 모습과는 많은 차이가 있을 것으로 추정한다. 현재의 금강계단은 석종형의 부도, 각 상들의 조각 수법 등으로 미루어보아 17세기 이후의 것으로 짐작된다.
1층 기단 안쪽 면에는 천인상을 조각하고 바깥쪽 면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인 제석(帝釋)의 모습을 조각하였다. 금강계단은 상하 2단의 구조로 아랫단 한 변의 길이는 약 9.8m이고, 윗단은 약 7m이며, 높이는 상하 각 40㎝·82㎝이고, 한가운데에는 높이 약 150㎝의 석종(石鐘)이 놓여 있다. 그리고 돌로 울타리를 만들어(석책 형식) 계단을 두르고 남쪽 한가운데에 출입구인 석문(石門)이 있었으나, 최근에 석책을 제거하고 새롭게 정비하였다.
금강계단은 건축구조와 건축사 연구, 계단이 가지고 있는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문화재로 평가받고 있다. 그리고 모습은 바뀌었지만 문헌기록상 가장 오래된 계단이며, 같은 성격을 띤 금산사·용연사의 것에 비하여 규모가 크고 조형상 아름답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의 계단 가운데 첫 번째로 손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