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양산문화대전 > 양산의 마을 이야기 > 읍성마을 > 사라진 성내리 이름 > 마을을 둘러싼 읍성의 흔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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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읍성의 처음 축성 시기는 정확하지 않다. 양산의 옛 지명이 삽량주이므로 성의 이름도 삽량성이었다. 고대 문헌에서 등장하는 삽량성의 기록에서 조선시대 이전의 양산읍성의 모습을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삼국사기』 권3, 463년(자비마립간 6) 2월에 ‘왜인이 삽량성을 침범했다가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라는 기록이 있어서, 현재의 석성의 형태는 아니겠지만 463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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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읍성은 신라시대에 만들어져서 여러 번의 재건축으로 모양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그 정신은 그대로 이어져왔다. 이 읍성이 본격적으로 증축되었던 것은 조선시대 문종 원년(1451)과 성종 24년(1492)에 증축되기에 이르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에는 읍성의 규모도 함께 기록되어 있는데, 읍성은 석축이며 둘레가 3710척, 높이고 13척, 성 안에 우물 6개와 못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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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은 조선을 강제를 점령한 이후 각 마을의 정신적 지주인 읍성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양산도 그러한 절차를 밟게 되었다. 1931년 양산읍성을 해체하고 읍성의 동헌 터에 일본식 건물인 양산군 청사를 건축하였다. 이로써 조선의 고유의 읍성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동헌 자리에 있었던 의춘당, 동헌 아문인 경성루(警省樓)와 서쪽 누각인 춘설루(春雪樓)는 이제는 저 먼 기억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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객사는 동헌과 함께 지방군현 관청의 중심이다. 객사에는 건물의 중앙에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 즉 궐패(闕牌)와 전패(殿牌)를 모셔놓고 초하루와 보름(음력 1일과 15일)에 지방 수령이 대궐을 향해 제사를 올리는 곳이다. 따라서 양산객사에 모셔놓은 위패는 살아있는 임금을 상징함으로 일반적인 사당과는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또한 객사는 외부의 손님이 오시면 접대하는 일종의 영빈관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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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읍성은 우리의 기억 저편 속으로 사라져 버린 지 오래되었다. 하지만 양산읍성의 모습은 흔적도 없이 사려졌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서는 아직도 살아 숨쉬고 있다. 그중 아름다운 영남의 모습을 자라하던 8루 중의 하나인 쌍벽루가 양산읍성의 마을에 있었다. 쌍벽루(雙碧樓)는 양산읍성 내의 관청의 부속건물, 즉 객사의 서루이다. 객사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누각 아래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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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읍성 내의 마을인 성내리는 성안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현재 양산읍성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으며, 성내리라는 지명도 읍성과 함께 사라져 다른 마을들과 함께 통합되어 나눠진 상태이다. 그리하여 지금은 성내리의 예전 모습을 상상하기 조차 힘들다. 하지만 성내리의 일부 모습들은 찾을 수 있는데 그것이 바로 남북로이다. 성내리의 남북로는 현재 미로의 흔적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