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0156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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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趙英圭 |
영어음역 | Jo Yeonggyu |
이칭/별칭 | 옥첨(玉瞻)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정수 |
[정의]
조선 중기 양산군수를 역임한 무신.
[활동사항]
조영규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남달랐으며, 힘이 일반 사람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천성이 어질고 담대하였으며, 판단력이 뛰어났을 뿐만 아니라 힘이 특별히 세고 몸이 날래어 1544년(명종 9) 무과에 합격하였다. 제주판관을 거쳐서 무장군수와 영암군수 등을 역임하였는데, 어질고 청백한 다스림으로 인해 가는 곳마다 많은 칭송을 받았다.
조영규가 양산군수로 재임 중이던 1592년(선조 25)에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군의 선봉이 동래성을 공격하자 경상우병사 이각(李珏)은 군사를 버리고 도망쳤으나, 조영규는 오히려 동래부사 송상현(宋象賢)을 찾아가 생사를 같이하기로 기약하였다.
당시 노모가 조영규의 근무지인 양산 지역에 있었으므로, 다시 양산 지역으로 돌아와 노모와 작별하고 동래성으로 돌아갔다. 이미 왜군이 동래성을 포위하고 있었지만, 단기(單騎)로 돌진하여 적진을 통과, 동래성 내로 들어가 왜군과 끝까지 싸웠다. 동래성이 왜군에 함락되자 송상현과 함께 죽음을 당하였는데, 조영규의 당시 나이는 58세였다.
[상훈과 추모]
1669년(현종 10) 송준길(宋浚吉)의 상계로 조영규의 효행과 충절이 알려져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동래의 안락서원(安樂書院), 양산의 충렬사(忠烈祠), 장성의 모암서원(慕巖書院)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