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A0102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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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원동면 용당리 용당들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기혁 |
옛날 용당리에는 논농사를 할 수 있는 지리적 여건이 갖추어져 있지 않아 마을사람들의 삶이 대단히 곤궁했었다. ‘처녀가 시집갈 때까지 쌀 서 말을 먹지 못한다.’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데서 나온 것이었다.
예전 이곳 용당리에는 논농사가 잘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것은 이곳이 홍수로 물난리가 많이 일어나는 곳이어서 예전부터 논농사를 피하고 다른 농작물을 심었기 때문이었다.
본래 용당리는 물난리가 자주 일어나는 지역이 아니었다. 예전 이곳이 가야진이었고 낙동강이 흐르고 있었기 때문에 주변이 매우 비옥하고 넓은 부지에 여러 곡식들을 자라나고 있었다. 또 당시는 육로보다는 강을 이용하는 빈도가 높았기 때문에 이곳 가야진 용당은 조선 전기부터 3일장시와 8일장시가 열려 물산의 거래가 매우 활발하였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상거래를 하기 위해 드나들었고, 물자의 이동이 많아 마을이 발달하여 시골치고는 제법 잘 사는 마을이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가 되면서 상황은 완전히 바뀌었다. 1905년 경부선 철도가 부설되면서 마을의 용당 벌판을 두 동강으로 잘라버리게 되었다. 이때부터 용당마을은 낙동강과 철도 사이에 놓이게 되어 길이 없어지게 되었고, 마을로 드나드는 유일한 통로는 철도 건널목을 통과하는 방법밖에 없게 되었다.
그런데 가장 큰 문제는 용당들 가운데로 지나는 철도의 설치로 강의 폭이 줄어들어서 조금만 비가 와도 논과 밭이 물에 가라앉게 되고, 마을이 물바다가 된다는 것이었다. 결국 지형을 고려하지 않은 철도부설로 인하여 용당마을 사람들의 삶의 터가 엉망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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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 가운데를 달리는 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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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물의 범람
결국 본래 용당리에 있던 원동의 면사무소도 원리로 옮겨지게 되고 원동의 중심지에서 벗어나 버리게 되었으며,낙동강 근처의 마을들도 지금의 중리나 당곡마을로 옮기게 되었다. 철도의 부설은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마을을 사라지게 하였다.
낙동강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다시 마을을 이루어 살다보니 이 지역은 산자락이어서 농지보다는 임야가 많았다. 천태산을 뒷산으로 하여 터를 잡은 마을 사람들은 이전의 논농사를 포기하고 밭농사를 주로 하면서 생계를 유지하였다.
이런 삶이 계속되다보니 일 년 동안 쌀 구경하기는 어렵고 겨우 쌀밥을 구경하는 날이 조상의 제사를 모시는 날, 가족 생일, 명절 날, 몸이 아파 흰 죽을 끊일 때 등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은 일제가 중국과 전쟁을 한창 벌이고 있을 때 제일 심했다고 한다.
1930년대 일제는 우리나라를 대동아전쟁의 침략기지로 이용하였다. 모든 물자뿐만 아니라 사람까지 끌고 가서 총알받이로 이용하였다. 이 시기에 용당리의 마을 사람들의 사정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먹을거리가 별로 없었던 이 지역에 일제는 그나마 종자로써 남아 있는 쌀마저도 빼앗아 가버렸다. 마을 사람들은 만주에서 기름을 짜고 남은 콩비지나 동남아에서 들여온 쌀을 배급타서 먹고 목숨을 연명하였다.
그 때는 정말 먹을 것이 너무나도 없고 쌀이 귀했다. 쌀이 조금이라도 있는 집이라도 집집마다 집 뒤 장독대 밑이나 볏짚동아리, 대밭 등지에 땅을 파서 독을 묻어가지고 거기에 쌀을 넣어서 눈가림을 하는 일도 많았다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몰래 쌀을 숨겨 뒀다가 농사일 한참 힘들 여름에는 보리밥에 쌀을 조금씩 섞어서 밥을 담는데, 그래도 가족 가운데 가장 힘을 많이 쓰는 아버지, 오빠 순으로 담고 어머니와 딸들은 매일 다 담고 남은 찌꺼기를 먹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말해주는 것이 바로 ‘시집가기 전에 처녀들은 쌀 서 말을 먹지 못한다.’는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