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B0301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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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지산리 구판장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종락 |
만남의 광장에서 김명관(79) 할아버지를 만났다. 그는 6·25 참전 용사이다. 6·25가 발발하던 1950년 9월 30일 입대했다. 군번은 ‘0207833’, 부산 군번으로 훈련소 안 가고 부산에서 3개월 있다가 제9사단이 창설되면서 전속되었다. 그 후 휴전이 될 때까지 전투에 나섰고 1956년에 일등중사로 제대했다.
제대 명령은 ‘육특을 306호’ 군번이며 입대일자, 제대명령까지 외우고 있다는 것은 아직까지도 투철한 군인정신이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 같다. 계급을 달거나 달지 않았더라도 자유를 지키고, 조국의 영토를 사수하기 위하여 흘린 피와 땀은 말하지 않아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나라를 위한 그들의 고귀한 희생이 있었기에 이렇게 오늘의 우리가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김명관 할아버지는 군복무 중 25살 되던 해에 휴가 나와서 결혼하여 26살에 큰아들을 낳았다. 슬하에 5남 2녀를 두었는데 큰아들은 김해에서 비닐공장을 경영하고 있고, 둘째도 김해에, 셋째는 서울에 살면서 목공회사에 근무하고, 넷째는 함께 살고 있다. 막내아들은 경산의 삼성전자에 근무하고 딸들은 모두 서울에 살고 있는데 “괜찮게 살고 있다.”고 한다.
“막내 저놈 우째 가지고 들어갔는지 자발적으로 성공했지. 봄에는 회사에서 보내 주가꼬 브라질 갔다 왔심더. 아는 착합니더. 지가 벌어가 아파트 하나 사가꼬 있는 거 보믄 대단하다 싶고예. ‘아버지 가까?’하니까 ‘오이소.’라고 바로 하드라니까.” 할아버지께서는 막내아들 칭찬에 입이 마르신다. 막내아들 생각만 하면 마음이 뿌듯해지는 모양이다. 그게 부모 마음이리라.
김명관 할아버지는 젊은 시절, 주로 제재소에서 일했다. 영덕에서 나무를 베는 산판에서 3년 정도 일하기도 했다. “목도를 해서 나무를 운반하는데 다른 사람들은 목에 이만한 혹이 나는데 우리는 그게 안나데?”라면서 원기왕성했던 그 시절, 자신의 탄탄했던 체력을 자랑한다.
“김해에 늘 있다가 아들 비닐공장이 거기에 있거든예. 저거한테 치댈라카이 미안해서 이리로 왔심더.”라며 자식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으려는 부모의 마음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움직일 때까지 있어야지. 여기 와서 하루하루 산에 가서 나물 뜯어 먹고 그래 삽니더.”라고 한다. 그만큼 소박하게 살고 있다는 말인 것 같다.
할아버지 부부는 부산, 김해 등지에 살다가 10년 전에 이곳으로 옮겨 왔다. 몸이 불편해서 일을 잘 하지 못하는 할머니를 대신해서 갖가지 푸성귀를 장만하고, 할머니는 그것을 들고 만남의 광장에 앉아서 팔기도 한다.
농경사회에는 일손이 있어야 하기 때문에 대가족을 이루고 살았지만 산업화시대를 지나 정보화시대인 지금은 가족의 구성원이 그리 많지 않다. 그러기에 등 기대고 살아가는 부부는 서로에게 가장 소중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20대 부부는 서로 신나서 살고, 30대 부부는 서로 환멸을 느끼며 살고, 40대 부부는 서로 포기하며 살고, 50대 부부는 서로 불쌍해서 살고, 60대 부부는 서로 필요해서 살고, 70대 부부는 서로 고마워서 산다.’고 했던가. 김명관 할아버지 부부는 지금 서로 고마워하며 살고 있음에 틀림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