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D0102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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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명동 명동마을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종봉 |
명동은 흥려박씨와 학성이씨가 어우러져 사는 집성촌이다. 명동마을의 이러한 내력을 보여주는 것이 흥려박씨 문중 사당인 귀후재이다. 이 사당의 구조는 콘크리트 목조건축 형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의 겹처마로 이루어져 있다. 출입문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집을 거쳐서 들어가야만 대문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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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후재
정문에는 신덕문(愼德門)이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신덕이라는 것은 몸을 삼가서 덕을 함양하라는 뜻이다. 개가 짖어 들어가지 못하고 뒷문으로 담을 넘어 들어가서 구경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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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덕문(愼德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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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실의 위패
재실의 위패는 박지영-박홍남-박계영 3분을 중심으로 여러 위패를 모시고 있고, 이들에 대해 매년 음력 10월 15일에 묘사를 지낸다. 그 아래의 후손들은 별도로 날을 정해 시제를 지낸다. 이 때 문중회의도 겸한다고 한다. 비용은 이전에는 전답, 즉 토지가 중심이었는데, 근래 토지를 팔고 이를 기금으로 삼아 제사에 필요한 모든 비용을 지출한다고 한다.
흥려박씨와 관련된 재미난 전설이 전하고 있다. 양산 통도사 짓기 이전에 통도사보다도 더 엄청나게 큰 사찰이 있었다. 원효대사가 중국 승려 천 명을 데리고 와서 이곳에서 숙식시키며 공부시켰더니 이를 보기 위하여 사람들이 많이 오게 되었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오는 것이 귀찮아진 주지 스님이 어느 도인에게 물었더니 절 입구에 있는 선자바위를 깨면 손님이 오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주지는 그 도인의 말대로 선자바위를 징으로 깨뜨렸드니 금 비들기 세 마리가 그 곳에서 나왔다. 한 마리는 양산 명동마을 박씨들 대밭으로 앉았는데 그 후에 흥려박씨 중에 박이명이 태어나 팔도 병사 자리에 올랐다. 이것이 전설의 주요 줄거리이다.
흥려박씨가 이곳에 언제부터 정착하였을까? 흥려박씨의 시조는 나말여초 울산의 대표적인 호족인 박윤웅(朴尹雄)이다. 고려시대에는 울산에서 계속 살았던 듯싶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집성촌은 대체로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에 형성된 경우가 많다. 이때는 정치세력 또는 계층간의 갈등이 많이 일어나는 시기여서 성씨의 이동이 잦고 또 집성촌이 이루어지고 있다.
명동의 흥려박씨의 문중도 그와 유사하다. 실제 명동에는 흥려박씨의 14대 종손인 박장식 님이 살고 있다. 그에 의하면 흥려박씨 입향조는 박지영(朴之英)이라고 한다. 박지영의 아들인 박홍남(朴鴻楠)은 임진왜란 때 경주 지역을 중심으로 의병운동을 한 인물이다. 시간적으로 보아도 흥려박씨는 16세기 후반경에 이곳 명동에 들어와 집성촌을 이룬 것으로 추정된다. 주민들의 증언에는 이곳 마을의 내력이 잘 담겨져 있다. “여기 15대째 살던 분도 있다. 여기는 학성이씨와 흥려박씨가 토박이다. 옛날에는 학성이씨가 많았는데 요즈음은 박씨가 더 많다. 학성이씨들은 외지로 많이 나가고 있다.”(명동마을, 이자무, 62, 명동 이장) 이렇듯 흥려박씨는 명동마을을 지키는 토박이로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또 이들은 자신의 집안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 귀후재라는 사당을 지어서 선조들의 제사를 함께 모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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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려박씨 종손
고령(高靈) 김성도(金聲燾)가 지은 「귀후재기」의 내용에 귀후재에 얽힌 정신이 잘 담겨져 있다.
그 내용의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우풍현(虞風縣)의 명곡촌(椧谷村)에 우뚝 솟은 정사가 있으니 곧 선무공신(宣武功臣) 훈련봉사(訓練奉事) 박공(朴公)의 묘소 아래 재실로서 이는 3백 년 동안 서둘지 못하였던 일로서 대대로 감회가 있었는데, 이제 그 후손 장식(長植), 명수(明守), 정건(正鍵) 등이 여러 친족들과 조상의 뜻을 이어받아 힘을 모아 만든 것다. 집은 모두 두 채를 만들었는데, 동서 두 내실은 춘추 제사 때 모여서 재계하는 곳으로 하고, 그 가운데는 비워 반침마루를 만들어 제반 회합을 하는 곳으로 삼고, 앞에 두 요(寮)가 있는데 중간을 통하여 문간이 되었으니, 재사 이름은 귀후(歸厚)이고 문 이름은 신덕(愼德)이니 마지막을 삼가고 먼 조상을 추모하면 백성의 덕이 두터워지기 위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