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4E0302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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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경상남도 양산시 북부동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엄원대 |
장맛비가 잠시 멈춘 어느 후텁지근한 날 오후, 예고도 없이 불쑥 이형우 씨(79세)의 다방동 자택을 방문했다. 예고가 없었던 것은 지금도 가축병원을 꾸려나가고 있겠거니 해서였다. 마침 지인과 더불어 약주를 즐기던 차라 반가이 맞아줬다. 일제에 의해 多芳이라 바뀐 지명이 하루 빨리 원래의 지명인 茶芳(이곳 원주민들은 지금도 다방이 아니라 차방이라 일컫고 있다)으로 되기를 바란다는 말로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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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형우 씨
이씨는 15세 되던 1944년 4월 양산고등학교의 전신인 양산농업전수학교에 입학했다. 그리고 양산농업중학교 때 졸업을 했다. 그 사이 함께 입학했던 동기들이 2년제와 3년제를 졸업해 버림으로써 선배 아닌 선배가 되어버렸다. 그러다 보니 이씨가 입학할 당시에 70명이었던 학우들이 졸업할 당시에는 26명만 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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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산고등학교
이씨가 오늘날의 학제로 볼 때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과정을 이수하고 있을 즈음의 일제는 패전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기 시작했을 무렵이라 거의 이성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수업은 일주일 가운데 월요일 날 단 한 시간만 했다. 일본인 교사는 부산 같은 큰 도시에 비해 지적수준이 턱없이 낮았다. 그런 그들이 하는 교양시사강좌의 주제는 늘 머잖아 승전할 것이라는 게 전부였다. 그리고는 내원사·통도사로 송탄유를 만들기 위한 솔괭이를 채취하러 가지 않으면, 저수지 축조에 동원되었다. 그것도 모자라 나중에는 부산 충무동에서 송도로 넘어가는 산자락을 발파해서 나온 돌을 배로 부산 중앙부두 건설 현장까지 나르는 일에 동원되었다. 살을 에는 바닷바람을 맞아가며 혹독한 중노동을 강요받았다. 지금도 당시를 생각하면 몸서리가 쳐진다고 한다.
2학년 때 광복이 되었다. 그러자 이제는 자신들을 가르칠 조선인 교사가 태부족이었다. 3학년이 되어서야 일본에서 유학하다 귀국한 사람들이 수업을 맡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학생들이 한글을 제대로 알지 못해 어려움이 있었다. 한글은 초등학교 2학년까지 밖에 배우지 못했고, 이후로는 줄곧 일본어를 국어라 강요당해 배웠기 때문이다.
아무튼 3학년이 되었을 때 이항녕 선생이 부임해 왔다. 그는 경성제대 법과 출신으로 고등고시에 합격한 뒤 창녕군수를 거쳐 하동군수 재임 중에 광복을 맞이했다. 그는 일본의 국록을 먹었으니 스스로를 친일파라 하면서 그 죄를 조금이나마 용서받기 위한 방편으로 후진양성에 몸 바치기로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부산에 있던 경남학무국을 찾아가서 초등학교 교원이 될 수 있게 부탁을 했다. 초등학생부터 가르쳐봐야 옳은 교육자가 되겠기에 그랬다고 한다. 그러나 학무국 담당자는 경성제대에 군수 출신의 그에게 평교사는 맞지 않다며 금정구 소재 청룡초등학교 교장으로 발령을 내려 그곳에서 몇 달을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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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항녕 선생
이듬해인 1946년, 그 당시 양산고교 교장은 양산초등학교 교장이 겸직하고 있었던 터라 이 학교로 다시 발령이 났다고 한다. 학제 변경으로 본의 아니게 늘 학교에서 최고 학년이었던 이씨가 소속된 학년에 이항녕 교장은 집중적으로 시간을 할애했다. 비로소 이씨는 이때부터 수업다운 수업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의 수업 시간은 50분 수업에 10분 휴식이었지만 그는 110분 동안 연강을 한 뒤 10분 쉬는 수업을 했다. 그래도 전공을 넘나드는 박학다식한 그의 강의에 심취한 학생들은 50분 수업에도 진저리 치던 학생들마저 강의가 끝났음조차 모를 때가 허다했다. 그도 그럴 것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단군조선을 비롯해서 양산 관련 역사 따위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교안도 없이 이루어진 그의 강의는 맨 처음에 단군조선부터 현대사까지에 이르는 한국사를 시작으로 해서 동양사, 서양사, 논리학, 윤리학의 순서로 진행된 뒤 나중에는 그 영역들을 종횡무진으로 넘나들며 열강을 했다. 그는 시험을 치르지 않고 강의내용을 받아 적은 노트를 거둬가서 평가를 했다. 이런 강의 내용의 일부는 뒷날 대학에 갔을 때 다시 듣게 되었다. 그는 대학에서 가르칠 수준의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하여 이미 고등학생들에게 가르쳤던 것이다. 그와 같은 훌륭한 선행학습으로 인해 다른 대학 동기들과는 학문적 토론이 제대로 되지 않을 정도로 자신들의 지적수준이 높아져 있었다.
이와 같은 열정을 보여준 그가 자신들이 5학년 말이 되었을 때 부산으로 전근을 가려 했다. 동기들은 그러실 수 없다며 선생 앞에 무릎 꿇고 연좌시위를 했다. 그래서 6학년 때까지 근무하기로 약속을 받아냈다. 약속을 지킨 선생이 부산으로 전출하고 이씨는 1950년 5월 4일에 졸업을 했다. 그리고 한 달이 채 안된 6월 25일에 남침이 일어났으니 선생은 선견지명까지 있었던 듯싶다. 지금 양산고등학교 교정에는 이씨의 동기들이 주축이 된 많은 졸업생들에 의해 세워진 그에 대한 사은비가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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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은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