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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637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철희

[정의]

6·25 전쟁 전후에 전라북도 순창군을 중심으로 활동했던 공산 게릴라.

[개설]

빨치산은 1945년 해방 이후부터 1948년 여순 사건과 1950년 6·25 전쟁을 거쳐 1955년까지 활동했던 공산주의 비정규군을 말한다. 빨치산이 빨갱이로 통용되는 경우가 있으나, 빨치산은 러시아어 파르티잔(partizan), 곧 노동자나 농민들로 조직된 비정규군을 일컫는 말로 유격대와 가까운 의미이다. 이것이 이념 분쟁 과정을 통하여 좌익 계통을 통틀어 비하하고 적대감을 조성하는 용어로 표현된 것이 빨갱이다. 흔히 조선 인민 유격대라고 부르며, 남부군이나 공비, 공산 게릴라라는 표현도 사용되었다.

[변천]

육지에서의 본격적인 빨치산 활동은 여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여순 사건은 제주도 4·3 사건을 진압하기 위해 1948년 10월 11일 제주도 경비 사령부가 설치되고 육지 부대인 부산 주둔 제5 연대, 대구 주둔 제6 연대, 여수 주둔 제14 연대의 각각 1개 대대가 출병하기로 하였다. 이 중에서 여수 주둔 제14 연대의 일부 군인을 중심으로 ‘동족상잔 절대 반대’, ‘미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면서 1948년 10월 19일 봉기하였다.

10월 19일 밤에 시작된 여순 사건은 10월 23일 순천이 토벌군에 의해 탈환되고, 27일 여수가 탈환되면서 일단락되었다. 하지만 김지회(金智會), 홍순석(洪淳錫)의 지휘로 지리산 등으로 입산한 반군들이 지리산을 중심으로 순창 회문산, 합천 황매산, 무주 덕유산 등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면서 유격 투쟁이 본격화 되었다. 일반적으로 빨치산을 구빨치산과 신빨치산으로 나누는데, 6·25 전쟁 이전에 입산한 빨치산을 구빨치산이라고 하며, 6·25 전쟁 이후에 입산한 빨치산을 신빨치산이라고 한다.

순창군 빨치산의 본격적인 활동은 6·25 전쟁 시기부터 시작되었다. 순창군 쌍치면, 복흥면, 구림면은 해발 200m 이상의 산악 지대로서 6·25 전쟁 시기 회문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조선 노동당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위치하면서 근거지로 활용되었다. 빨치산을 토벌하기 위해 국군과 경찰은 토벌대를 창설하였다. 1948년 10월 30일 호남 방면 전투 사령부 북지구 전투 사령부[제2 여단장 원용덕]·남지구 전투 사령부[제5 여단장 김백일]를 창설하였다.

1949년 3월 1일 호남 지구 전투 사령부[원용덕 준장], 1949년 9월 22일 지리산 지구 전투 사령부[정일권 준장], 1950년 10월 15일 제3 군단 예하 제11 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이 작전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1950년 12월 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최치환 총경], 1951년 11월 16일 백야 전투 사령부[사령관 백선엽], 1953년 5월 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김용배 준장] 등도 빨치산 토벌을 단행하였다.

1951년 2월에 회문산에는 약 1,350명의 빨치산이 거점을 구축하고 있었다. 화랑 사단이라 불리던 11사단[최덕신 준장]의 20연대 제1 대대와 제2 대대가 회문산에 투입되었다. 이들의 작전 개념은 견벽청야(堅壁淸野)라는 초토화 작전이었다. 1955년 7월 1일 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가 ‘해산 선언’을 낭독하면서 빨치산 토벌대가 정식으로 해산되었다. 하지만 지리산·덕유산·회문산 등에는 한두 명의 소규모 빨치산이 잔존하고 있었다. 마지막 빨치산으로 알려진 정순덕은 1963년 11월 12일 경상남도 산청군 지리산 기슭에서 체포되었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 순창 지역은 1950년 10월경 경찰과 국군이 진입하여 일부 지역을 수복하였으나 치안이 완전히 회복된 것은 아니었으며, 특히 쌍치면을 비롯한 산간 지역은 미수복 지구로 남아 군경과 빨치산 사이의 교전이 지속되었다. 국군 제11 사단 예하 20연대는 순창군 일대에서 1950년 11월 6일부터 1951년 3월 30일까지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으며, 1951년 4월부터는 제8 사단에게 호남지구 토벌 작전을 인계하였다. 이 기간 동안 빨치산이 점령하고 있던 쌍치면을 비롯한 ‘미수복 지구’에 거주하는 주민들은 빨치산에게 협력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이에 군경은 빨치산 점령 지역 마을 주민들을 소개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토벌 작전 과정에서 빨치산은 도주하고 주민들이 마을에 남아 있게 됨에 따라 민간인이 희생되는 사건들이 발생하였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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