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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빨치산 토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073
한자 淳昌-討伐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철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단 시기/일시 1948년 10월 19일 - 여순 사건 발발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11월 6일연표보기 - 순창 빨치산 토벌 시작
전개 시기/일시 1950년 12월 - 순창 빨치산 토벌 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에서 실시
전개 시기/일시 1951년 4월 - 국군 제8사단 호남 지구 토벌 작전 실시
전개 시기/일시 1951년 11월 16일 - 순창 빨치산 토벌 백야 전투 사령부에서 실시
전개 시기/일시 1953년 5월 - 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에서 순창 빨치산 토벌 실시
발생|시작 장소 회문산 -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안정리 지도보기
성격 빨치산 토벌 사건
관련 인물/단체 국군 제11사단|국군 제8사단

[정의]

1950~1951년에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군경이 빨치산 활동 근거지인 회문산 일대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대대적으로 벌인 토벌 작전.

[역사적 배경]

1948년 10월 19일 여순 사건 발발로 인하여 제14연대 전투 부대가 산으로 숨어들어 가면서 빨치산의 주력 부대가 되었다. 정부는 이들을 대대적으로 토벌하기 위해 1948년 10월 30일 호남 방면 전투 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송호성 준장을 임명하였다.

호남 방면 전투 사령부는 구례~압록~옥천~담양~고창을 중심으로 남북으로 전투 지역을 설정하였다. 북지구 전투 사령부는 제2여단장 원용덕 대령을 중심으로 제2연대, 제3연대, 제6연대의 1개 대대, 제15연대의 1개 대대로 구성하여 남원에 주둔하였다. 남원 지구 전투 사령부는 제5여단장 김백일 중령을 중심으로 제4연대, 제20연대, 제12연대 2개 대대, 15연대 1개 대대로 순천에 주둔하였다. 국군은 여순 사건 이후 파생적으로 일어나는 빨치산 활동을 수습하고자 11월 1일 순창·남원·정읍·고창을 포함하는 계엄령 확대를 선포하였다.

[경과]

국군 제11사단[사단장 최덕신 준장]은 사단 사령부를 남원에 두고, 1950년 11월 6일부터 1951년 3월 30일까지 예하 제20연대가 순창군 일대에서 빨치산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제11사단 제20연대 제1대대는 전라남도 담양에 대대 본부를 두었으며, 제2대대는 장성에 대대 본부를 두고 토벌 작전을 전개하였다. 국군 제11사단 제20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의 순창 지역 토벌 작전을 날짜별로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1950년 11월 6일 순창 지구 섬멸 작전이 있었으며, 12월 6일에는 동계면 어치리 소탕전이 있었다. 1951년 1월 26일과 30일에는 복흥면 백방산 소탕전이, 2월 9일부터 16일까지는 구림면 회문산 및 장군봉 소탕전이 있었다. 2월 13일에는 구림면 장군봉 소탕전, 2월 14일에는 쌍치면 774-2 고지 및 동북방 고지 소탕전, 15일과 16일에는 순창군 쌍치면 644 고지 소탕전, 19일에는 순창군 쌍치면 586고지 소탕전, 21일에는 구림면 회문산 소탕전, 3월 5일에는 구림면 장군봉과 회문산 소탕전이 있었다.

1951년 4월부터는 국군 제8사단이 호남 지구 토벌 작전을 실시하였다. 『한국 전쟁 사료』 57권과 58권에 의하면, 국군 제8사단은 4월 15일과 16일 순창군 금성리의 고덕산 소탕전, 20일과 21일에는 쌍치면 소탕전, 5월 4일부터 10일까지는 국사봉 지구 토벌 작전, 12월 19일부터 이듬해 1월 2일까지는 쌍치면 토벌 작전이 있었다.

순창 지역에 출몰한 빨치산에 대하여 전라북도 경비 사령부가 발표한 1949년 8월 9일 자 신문 보도를 살펴보면, “1949년 8월 3일 하오 2시경 구림 지서에서 약 7㎞ 떨어진 월정리 장암 부락에 무장 폭도 10명이 침입하여 취침 중인 민가를 습격 구장을 납치하고 한청원 6명을 포박하는 등 부락의 쌀, 닭 등 물품을 약탈하고 전라남도 방면으로 도주하였는데 방금 경찰 기동대는 이를 추격 중에 있다[한청 전북 도단부 발표].”라고 하였다. 또한, “지난 7월 26일 하오 11시경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에 무장 폭도 약 50명이 내습하였는데, 이를 경찰 지서 및 면단부에 연락 중인 동단원 최(崔), 유(柳) 양인이 폭도에게 피살당하였다. 또한 27일 하오 2시경에는 동면 동산리에 무장 폭도 60명이 내습하였는데 이를 연락하려던 동리부단장 이(李)씨 외 1인은 폭도에 발견되어 피살당하였다.”[『동아 일보』, 1949. 8. 9]

순창 지역의 토벌 작전에 대한 성과는 정확하지 않지만, 1950년 2월 5일 자 신문에 전라북도 경찰국 비상 경비 사령부의 발표를 인용하여 보도하였다. 그 내용을 보면 “순창 관내 2구에서는 목하 군경의 대규모적 합동 작전으로 반도 주력 부대는 대부분 소탕되어 반도 완전 소탕은 시간문제라기보다 거의 전멸의 단계에 이르렀다고 한다. 그런데 30일 현재까지 전과를 동사령부에서는 다음과 같이 발표하였다. 지난 28일 오전 8시경 순창군 쌍치면 양신리에서 무장 폭도 1명을 생포하고 장총 1정 동실탄 8발 현금 6,000여 원 백미 5되를 압수. 또한 동일 오전 10시경 동군 복흥면 봉덕리 부근에 침입한 무장 폭도 1명을 생포하고 카빈총 1정 동실탄 21발을 압수.”[『동아 일보』, 1950. 2. 5]

1950년 10월에는 제3군단 예하 제11사단을 중심으로 작전이 전개되었으며, 1950년 12월 지리산 지구 전투 경찰 사령부[최치환 총경], 1951년 11월 16일 백야 전투 사령부[사령관 백선엽], 1953년 5월 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김용배 준장] 등이 순창 빨치산 토벌을 단행하였다. 특히 1951년 2월에는 화랑 사단이라 불리던 제11사단의 20연대 제1대대와 제2대대가 회문산(回文山)[830m]에 투입되었다.

[결과]

1948년부터 1950년 6·25 전쟁 발발 전까지 순창군 회문산 주변의 산악 지대에서 활동하던 빨치산은 국군과 경찰의 대대적인 토벌 작전으로 거의 잔존 부대로 남아 활동하였으나,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다시 세력을 확대하였다. 이로 인하여 회문산 인근에 거주하던 순창군 지역 민간인들의 고통은 매우 클 수밖에 없었다. 1955년 7월 1일 서남 지구 전투 사령부가 ‘해산 선언’을 낭독하면서 빨치산 토벌은 정식적으로 해산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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