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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자수, 처녀들의 부푼 꿈을 수놓다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004
한자 淳昌刺繡-處女-繡-
분야 생활·민속/생활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송화섭

[순창 자수의 명성]

조선 시대에는 규방(閨房) 문화가 발달하였다. 규방 문화는 집안에서 여인들이 생활하면서 여성으로서 배워야 하는 덕목과 예절, 기술, 예술 등 품격 있는 가사 활동을 포함하고 있다. 전통 사회에서 여성들은 주로 안채에서 생활하면서 바깥출입을 삼가야 하였다. 그래서 규방 문화는 안채에서 시어머니에서 며느리에게로 대를 이어 전승되어 갔다.

여성들은 안채에서 글씨를 쓰고 그림을 그리기도 하였지만, 손수 옷을 깁고 바느질하고 노리개, 매듭도 만들고 견단에 자수(刺繡)를 놓는 일까지 모든 여성 수업을 받았다. 여성 수업은 며느리에게는 음식 중심의 가사를 중점적으로 가르쳤지만, 시집갈 딸에게는 노리개, 매듭, 자수 등 생활 공예를 가르쳤다. 처녀들이 시집을 가려면 혼수품을 준비해야 하는데, 혼수품 가운데 자수는 필수적인 품목이었다. 자수는 병풍과 가리개 등을 만들기도 하지만, 주로 베게 딱지[베갯모], 밥상포 등을 만들었다.

순창 자수가 언제부터 명성을 가졌을까? 처녀들이 혼수품으로 자수를 준비하는 것은 규방 문화의 범주에 속한다. 순창에서는 고려 후기부터 조선 전기에 걸쳐 문벌지족이 성장하면서 품격 있는 규방 문화가 발달하였다. 명망(名望) 있는 집안에서는 부녀자들에게 가정 교육을 충실히 시켰던 것으로 보인다. 보물 제728호로 지정된 『설씨 부인 권선문(薛氏夫人勸善文)』이 대표적인 사례이다.

『설씨 부인 권선문』고령 신씨(高靈申氏) 가문의 설씨 부인이 그린 부도암 그림과 권선문의 문장을 짓고 손수 붓글씨로 쓴 권선문첩인데, 그림과 글의 솜씨가 매우 뛰어나 보물로 지정되었다.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신말주(申末舟)[1429~1503]의 처향(妻鄕)이고, 순창은 설씨 부인의 본향(本鄕)이다. 설씨 부인은 순창 향반(鄕班)인 옥천 설씨(玉川薛氏) 설백민의 딸이었다. 순창에서 나고 자란 설씨 부인의 글씨와 그림 솜씨는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에서 대대로 살아온 고령 신씨 가문에서 얼마나 수준 높은 규방 문화를 전수하였는지를 보여 준다.

순창 자수 기능인 제영옥[58세]은 순창 자수의 역사가 신말주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신말주가 문과에 급제하여 중앙의 관직에 나아갔는데 처가에서 만들어 준 흉배(胸背)를 가슴에 부착하고 단종(端宗)을 알현하였다. 단종이 흉배의 자수 문양이 매우 아름다워 어디에서 만든 흉배인지를 묻자, 신말주순창 가남리에서 만든 흉배라 대답하였다. 이때부터 순창 자수의 명성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순창은 자수의 명향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듯이,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남산대에는 신말주가 낙향하여 지은 귀래정(歸來亭)이 있다. 설씨 부인은 옥천 설씨 가문에서 교육을 받고 성장해서 고령 신씨 집으로 시집을 갔으니, 설씨 부인의 서화 솜씨는 옥천 설씨 가문의 규방 문화를 엿보게 한다.

[순창장의 처녀 골목과 자수 난전]

순창의 처녀들이 집에서 혼수품으로 자수를 놓은 솜씨가 상품화되기 시작한 것은 시장 경제의 확산과 맞물려 있다. 조선 시대 전통의 혼수품(婚需品)이 수공업 제품으로 상품화되어 시장에서 재화의 가치를 얻게 된 것이다. 1676년(숙종 2)에 상평통보(常平通寶)가 제작 유통되면서 시장 경제는 활성화를 맞이하였다. 보부상(褓負商)들이 상품 유통의 주역으로 활동하면서 전국 어느 곳이나 향시(鄕市)가 서게 되었다. 5일 장시(場市)가 향촌 단위에서 열리게 된 것도 17~18세기 이후의 일이다. 순창장(淳昌場)도 마찬가지이다.

순창 고을의 처녀들은 장날이 돌아오면 그동안 만들어 놓았던 자수를 들고 시장에 나와서 팔았다. 순창 고을 처녀들의 마음이 자수를 놓아 시집갈 설렘보다 자수로 돈을 벌 수 있다는 설렘으로 바뀌면서 자수를 놓는 일이 번창하였다. 마을마다 처녀들은 또래끼리 삼삼오오 짝을 지어 밤마다 수놓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낮에는 집안일을 하고 밤에는 수놓는 풍경이 마을마다 밤늦게까지 성행하였다. 같은 또래의 처녀들은 좁은 방 안에 모여서 방 가운데에 호롱불을 켜 놓고 어깨를 맞댄 채 빙 둘러앉아서 수놓는 것을 일삼았다.

자수품이 시장에서 재화로 환산되자, 처녀들뿐만 아니라 마을마다 부녀자들은 밤늦게까지 불을 켜고 수놓기를 일삼았다. 그리하여 순창 자수는 더욱 번성해 갔다. 주로 베개 딱지와 골침을 만들었다. 병풍과 가리개 작업은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에 다음 장날에 내다 팔 제품으로는 베개 딱지가 가장 적절한 자수품이었다. 베개 딱지로는 남자용의 사각 베개와 여자용의 둥근 베개에 붙일 원앙침을 수놓았다.

호롱불 밑에서 수놓기에 여념이 없다 보면 호롱불에 머리카락을 그을리기도 하고, 호롱불 연기로 콧구멍에서 매연 가루가 까맣게 묻어나기가 일쑤였다. 그래도 순창 장날이 돌아오면 시장에 나아가 팔아서 돈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으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밤을 새며 수놓기도 하였다.

순창장이 서는 날이면 그동안 만든 자수를 들고 새벽밥 챙겨 먹고 순창장으로 달려갔다. 순창의 처녀들이 자수품을 들고 새벽에 몰려든다 하여 ‘처녀 골목’, ‘처녀 시장’이라는 명칭이 생겨났다. 처녀 골목은 옛 물레방앗간 근처[현재 원불교 순창 교당과 순화당 한약방 사이] 골목에서 열리는 난전(亂廛)이었다. 자수품을 거래하는 점포가 있었던 게 아니라 골목에서 처녀들과 장사꾼의 거래가 직접 이뤄졌다.

처녀 골목에서는 자수를 놓는 본견, 베개판, 색실, 자수틀 등 자수에 필요한 제품을 팔기도 하였고, 번개시장처럼 새벽 5시 30분에서 6시 30분까지 잠깐 자수 시장이 서기도 하였다. 자수장(刺繡場)인 처녀 골목에서 자수를 사고팔기가 끝나면 동틀 무렵에 나무 시장이 서야 하였기 때문에, 자수를 팔려면 새벽밥 챙겨먹고 갈 수 밖에 없었다.

순창 자수를 매입하려는 자수 장사꾼들은 서울, 대구, 부산 등 전국에서 순창으로 왔고, 여인숙에서 잠을 잔 뒤에 장날 새벽에 처녀 골목에 모여들었다. 장사꾼들은 허리에 차 전대에 돈을 두둑하게 넣어 놓고 순창 자수를 매입하였다. 장사꾼들과 순창 처녀들이 처녀 골목에서 만나서 자수 난전(刺繡亂廛)이 열렸던 것이다.

솜씨가 좋은 제품은 비싼 값을 받았고 서투른 자수는 싼 가격을 받지만 전량 거래가 이루어졌다. 순창 자수는 윤기가 나고 색상이 고와서 상품성이 높았다. 처녀 골목에서는 자수를 들고 온 처녀들과 장사꾼들의 가격 흥정으로 장날 새벽마다 활기를 띠었다. 상품성이 있는 자수는 제 가격을 받지만, 재료값 정도밖에 받지 못하는 자수품도 많았다. 손에 돈을 받아 든 처녀들은 시장에서 군것질도 하고, 살림살이도 장만하고, 돈을 모아서 남동생과 오빠들의 학비를 대기도 하였다. 1960년대에 순창장 처녀 골목에서 베개 딱지 1켤레에 100원이었다고 한다.

1970년 초 기계 자수가 보급되면서 손 자수는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기계 자수는 순창 처녀들의 몫이 아니라 손 기술이 좋은 사람들이면 누구나 만들면서 대량 생산이 가능해졌고, 손 자수는 상품으로서 경쟁력을 잃게 되었다. 순창장의 처녀 골목은 전국적으로 소문난 자수 시장으로 명성을 얻었지만, 기계 자수에 밀려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손 자수의 전통은 순창에서 강인한 전승력을 갖고 있다.

[순창 자수의 전통]

베개 딱지는 베갯머리 양쪽 머리에 붙이는 자수를 말한다. 베개 딱지는 사각형의 원앙침과 둥근 원앙침 두 종류였다. 원암침의 자수 문양은 암탉과 수탉이 서로 마주 바라보고 그 사이에 병아리 7마리를 수놓는 방식이었다. 혼례식을 치른 신부는 원앙과 같이 금실 좋은 부부로서 첫날밤 비단 금침에서 자녀들을 많이 낳고 행복하게 살기를 소망하는 마음으로 한 올 한 올 원앙침을 수놓았다.

암탉, 수탉만 수놓는 게 아니라 처녀들의 꽃심도 자수틀에 그려졌다. 고령 신씨 가문의 설씨 부인이 그린 화조도(花鳥圖)는 신사임당(申師任堂)의 화조도보다 미술사적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데, 이러한 화조도의 아름다운 꽃심이 순창 처녀들에 의해서 자수로 화사하게 피어났다. 순창 자수는 베개 딱지와 병풍에 화조도, 모란 공작, 송학을 아름답게 수놓는 게 특징이었다. 병풍 화조도는 봄에 매화를 수놓고, 여름에는 난초, 등꽃을 수놓고, 가을에는 단풍을 수놓고, 겨울에는 동백을 수놓았다. 8폭 병풍의 화조도는 목단, 매화, 난초, 장미, 국화, 동백, 단풍 등과 학, 공작이 소나무와 함께 수놓아졌다.

순창 자수는 새로운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달라졌다. 설렘으로 준비하던 처녀들의 혼수품 자수가 상품으로 시장에서 팔리기 시작하면서 자수가 곧 재화가 되었다. 그리고 근대화 과정에서 전통 혼례가 서양식 혼례로 바뀌어 가고, 기계 자수가 들어와 자수 시장을 잠식하더니, 다양한 침실 문화가 발달하고 침구가 다양해지면서 자수 시장은 경쟁력을 잃게 되고 자수품의 상품성도 시들해졌다. 전통 자수는 보호하고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이지, 방치하고 폐기해야 할 무가치한 것은 아니다.

손 자수는 여인들의 섬섬옥수(纖纖玉手) 곱디고운 손길의 정성이 깃든 전통 예술품이다. 기계 자수처럼 대량 생산을 목적으로 만드는 상품이 아니다. 자수 한 올 한 올마다 섬세한 손 솜씨가 공단에 하나의 그림을 만들어 낸다. 몇 개월을 걸려서 병풍도 만들고 가리개도 만든다. 이러한 수제품을 다른 기계제품과 같은 상품으로 취급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손 자수는 분명 한국 전통 미술품이다.

지금 세상 어디에도 호롱불 밝히고 손 자수를 놓는 처녀들은 없다. 그러나 지금도 순창에서는 손 자수의 전통을 이으려는 여인들이 옛 전통을 지켜 오고 있다. 자수는 공예품이고 미술품이다. 이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손 자수의 전통이 순창에서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순창 자수 기능인 제영옥이 앞장서서 순창 자수의 전통을 살리고 맥을 잇는 데 열정적이다. 이제 베개 딱지와 병풍, 가리개를 만들기보다 소품, 장식품, 장신구를 만들어 현대인들이 소장 휴대할 수 있고 소비성 있는 상품 개발에 진력해야 한다.

손 자수는 주로 목단, 공작, 소나무, 학, 매화 등 아름다운 화조도를 수놓았다. 여인이 붓으로 한 폭의 화조도를 그리듯이, 처녀들도 실크 견단에 한 폭의 화조도를 수놓은 것이다. 이처럼 미술성이 뛰어난 자수품을 되살려 순창의 고유 상품으로 복원 육성할 필요가 있다. 이제 바야흐로 글로칼(Golcal) 시대를 맞고 있다. 순창이 곧 세계이고, 세계 어느 곳에서도 순창의 아름다운 손 자수가 상품으로 유통될 수 있는 시대가 왔다. 자수 시장도 기계 자수를 넘어서서 컴퓨터 자수 시대까지 왔다. 이러한 첨단 시대에 순창의 전통 자수가 고유 상품으로 순창 상표의 브랜드를 달고 전통 공예품으로 손 자수의 수제품을 개발하여 경쟁력 있는 상품화에 지혜를 모아야 할 때이다.

[참고문헌]
  • 송화섭 외, 『전북 전통 문화론』(글 누림, 2009)
  • 자료 제공(순창읍 주민 제영옥, 여, 58세, 2014)
  • 현지 조사(2014. 4.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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