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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030
한자 歷史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최범호

[정의]

선사 시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전라북도 순창군의 역사.

[고대]

순창에는 일찍이 후기 구석기시대부터 사람들이 살며 문화를 발전시켜왔다. 청동기 시대가 되면 고인돌이 보이는데, 동계면, 금과면, 팔덕면 일대에 집중적으로 산재되어 있다. 삼한 시대에는 마한의 영토로 오산(烏山) 또는 옥천(玉川)이라 불렀고, 삼국 시대에는 백제의 영토로 도실군(道實郡)이 되었다. 백제가 망하자 신라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757년(경덕왕 16) 순화군(淳化郡)으로 개칭되어 적성현(赤城縣)과 구고현(九皐縣)을 관할하였다. 삼국 시대와 통일 신라 시대에는 많은 사찰들이 세워졌다. 그중 634년(무왕 35) 숭제 법사(崇濟法師)가 창건한 구암사(龜巖寺)와 통일 신라 시대인 887년(진성여왕 1) 도선 국사(道先國師)가 창건하였다고 전하는 강천사(剛泉寺) 등이 대표적이다.

[고려 시대]

고려 시대에 들어와 940년(태조 23) 현재의 지명인 순창(淳昌)[일명 순주(淳州)]으로 개칭되었고, 1018년(현종 9) 순창현으로 강등되어 남원부의 속현이 되었다. 1175년(명종 5) 감무(監務)가 파견되었으며, 1314년(충숙왕 1) 당시 국통(國統)인 정오 선사(丁午禪師)의 고향이라 하여 다시 군으로 승격되었다.

고려 시대의 인물로는 1271년(원종 12) 세자 왕심(王諶)[훗날 충렬왕]이 몽골에 인질로 갔을 때 그를 배종하여 공신이 된 설공검(薛公儉)이 있다. 그리고 고려 말 오은(五隱)이라 칭송되는 농은(農隱) 조원길(趙元吉)이 있다. 조원길공양왕을 옹립하는 등 공을 세웠으며, 조선 건국에 참여하지 않고 순창에 은거하며 절의를 지켰다.

[조선 시대]

1409년(태종 9) 순창군은 18방(坊)을 관할하였으며, 이때부터 대체로 현재와 같은 행정 구역을 유지해 왔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당시 순창군의 호수는 317호, 인구는 1,092명이었다.

조선시대의 인물로는 많은 사람이 있다. 귀래정(歸來亭)신말주(申末舟)[1439~1503]는 단종이 폐위된 뒤 순창에 귀래정을 짓고 은거하였으며, 중종 때는 순창 군수 김정(金淨)[1486~1521]과 담양 부사 박상(朴祥)[1474~1530], 무안 현감 유옥(柳沃)강천산에 모여 관인(官印)을 나무에 걸고 폐비 신씨의 복위 상소를 올리기로 결의하였다. 각자의 관인을 나무에 걸었다 하여 삼인대(三印臺)라고 부른다. 하서(河西)김인후(金麟厚)[1510~1560]는 인종의 세자 시절 스승으로서 인종이 즉위한 뒤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고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낙향하여 순창에 훈몽재(訓蒙齋)를 짓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 때는 김치세(金致世)가 순창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병을 무찌른 공으로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병자호란 때는 순창 출신인 양여장(楊汝樟)[1610~1656]과 그의 종형인 양여매(楊汝梅)가 의병을 일으켜 경기도 남한산성으로 가던 중 강화(講和)가 성립되었다는 비보를 듣고 해산하기도 하였다.

신말주의 후손 여암(旅菴)신경준(申景濬)[1712~1781]은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韻解)』, 『일본 증운(日本證韻)』, 『강계지(疆界志)』, 『산수경(山水經)』, 『도로고(道路考)』 등 각종 문자학과 성운학(聲韻學), 지리학 등에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근대]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이 일어나자 순창 접주 우동원(禹棟源)이 동학군을 인솔하여 황토현 전투(黃土峴戰鬪)에서 관군을 격파하였다. 순창군은 1897년(고종 34) 18방(坊)을 18면으로 개편하여 집강(執綱)을 두고 18면을 관할하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에 따라 18개 면이 14개 면으로 바뀌었다. 1917년 좌부면우부면을 순창면, 1919년 금동면과 목과면을 금과면, 1935년 구암면무림면구림면으로 각각 병합하여 다시 11개 면이 되었다.

1905년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대한 제국 말 대유학자 최익현(崔益鉉)이 제자 임병찬(林秉瓚) 등과 함께 의병을 모집하여 순창 객사에 총본부를 두고 의병 활동을 전개하였다. 최익현 외에도 의병장 양춘영(楊春泳)·국동완(鞠東完) 등이 있다. 1919년 서울에서 3·1 운동이 일어나자 순창에서도 4월 11일을 기하여 만세 운동이 발발하였다. 3·1 운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상해 임시 정부가 설립되고 독립운동이 지속되었다. 순창 출신 김일두(金一斗)는 상해 임시 정부의 통신 책임자로 활약하다가 서울에 잠입하여 독립 군자금 조달에 힘쓰는 등 평생을 독립운동에 진력하였다. 설진영(薛鎭永)은 일본식 성명 강요[創氏改名]에 반대하여 투신자살하기도 하였다.

[현대]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각급 관청과 교회·주택 등이 파괴되었다. 순창 농림 중학교 학생들은 학도 의용군에 대거 가담하여 포항 전투에서 158명이 전사하였다. 또한 9·28 수복 후에는 순창군 구림면 회문산 공비 토벌 작전에 참가하여 향토 수호를 위해 싸우기도 하였다. 6·25 전쟁이 끝난 뒤 전후 복구 사업과 1970년대 새마을 사업 등으로 순창의 오늘이 만들어졌다. 1979년 5월 1일 순창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7년 1월 1일 남원군 대강면 입암리 일부가 유등면에 편입되었다. 1996년 1월 15일 쌍치면 적곡리가 종곡리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4년 현재 순창군은 1읍[순창읍], 10면[인계면·동계면·적성면·유등면·풍산면·금과면·팔덕면··복흥면·쌍치면·구림면] 305 행정리이며 군청 소재지는 순창읍 경천로 33에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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