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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289
한자 龜岩寺
이칭/별칭 영구사(靈龜寺)
분야 종교/불교
유형 기관 단체/사찰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봉덕길 131-144[봉덕리 374]
시대 고대/삼국 시대
집필자 배옥영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634년연표보기 - 구암사 창건
중수|중창 시기/일시 1392년 - 구암사 각운 법사 중창
최초 건립지 구암사 - 전라북도 순창군 영구산
현 소재지 구암사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봉덕길 131-144[봉덕리 374]지도보기
성격 사찰
창건자 숭제 법사
전화 063-653-7641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봉덕리에 있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4교구 본사 선운사 소속 사찰.

[개설]

구암사(龜岩寺)는 호남정맥의 주봉인 영구산(靈龜山)[현 도집산(都集山) 해발 720m] 중턱에 위치하고 있다. 순창 지역은 서북쪽으로는 호남정맥의 주 능선을 경계로 전라북도 정읍시와, 남쪽으로는 전라남도 장성군·담양군·곡성군, 북쪽은 전라북도 임실군과 인접하고 있는 주로 회문산(回文山)·장군봉(將軍峰)·여분산(如紛山)·깃대봉·국사봉(國師峰)·내장산(內藏山)·백방산(栢芳山) 등 명산을 끼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섬진강이 동부로 흐르고 있어 아름다운 산세를 끼고 일찍부터 불교문화가 흥성하였던 곳이다. 특히 고려 시대 국통(國統) 정오 선사(正午禪師)의 고향이 순창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찰이 들어서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순창 지역에 불교가 처음 유입되어 사찰이 세워진 시기는 7세기 반 경 전라북도 지방에 불교 유입이 확대되면서부터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이나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기록에 의하면 순창에 7세기 반경에 취암사와 서룡사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자세한 내용은 알 수 없다.

[건립 경위 및 변천]

구암사에 대해서는 634년(무왕 35) 숭제 법사(崇濟法師)가 구암사(龜巖寺)를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가장 먼저이다. 절을 세운 숭제 법사가 신라 경덕왕 때 활약하였던 진표(眞表)의 스승인 숭제와 같은 인물인지는 정확하지 않다.

1392년(태조 1) 구곡(龜谷) 각운(覺雲)이 중창하였고, 태종 때에도 중창한 뒤 구암사로 이름을 바꾸었다. ‘구암사’라 함은 사찰 동편 지점에 숫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고, 대웅전 밑에는 암거북 모양의 바위가 있어 구암사라 하였으며, 신령스러운 거북 모양을 닮았다고 해서 구암사가 있던 산을 영구산이라 명명하였다고 전해진다. 당시 절터는 현재 구암 폭포가 있는 부근이었다. 이후 사세가 점차 번창하여 전국 규모의 수도 도량을 이루었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불에 탔다.

구암사가 다시 사세를 크게 일으킨 것은 영조 때[재위: 1724~1776] 화엄 종주인 설파(雪坡) 상언(尙彦)[1707~1791] 이 머물면서부터이다. 설파구암사에서 선강 법회(禪講法會)를 열어 불교문화의 꽃을 피웠으며, 이로부터 100여 년간 화엄 종맥의 법손이 계승되었다. 당시 구암사는 전국 굴지의 사찰로 각처에서 운집한 승려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 그 후 강원, 선원 등으로 구분해 존속해 오다가 임진왜란 때 병화(兵火)로 전소되었다.

1800년대 초에는 백파(白坡) 긍선(亘璇)[1767~1852]이 현재의 절터에 건물을 중창하고 선강 법회를 열어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승려 백파의 설법으로 입산수도한 승려가 각처에서 운집하여 선문 중흥조라 일컬었고, 그 법맥이 고창 선운사와 정읍 내장사, 장성 백양사, 해남 대흥사 등에 전법(傳法)하였으며, 헌종(憲宗) 때는 승려 설두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6]이 친교 정진하였다. 특히 긍선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와 교유하며 많은 편지를 남겼다. 이후 정관(正觀)[?~1813], 설두(雪竇) 유형(有炯)[1824~1889], 설유(雪乳) 처명(處明)[1858~1904], 학명(鶴鳴)[1867~1929], 석전(石顚)[1870~1948], 운기(雲起)[1898~1982] 등 많은 고승이 구암사에서 배출되었다. 이 가운데 설두는 성리학자인 노사 기정진과 불교 사상에 관해 문답을 나누었으며, 설유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와 사상을 교류하였다. 조선 후기 전라도 관찰사였던 이경상은 긍선의 인품에 감동하여 인근 전답 350마지기를 기부하였고, 고종 때 어사인 이면상(李冕相)은 절 건물을 중건하기도 하는 등 학자나 정치인들과 얽힌 일화도 많이 전한다. 한편 ‘석전’의 법호는 김정희긍선에게 준 글에서 따온 것이라고 하는데, 김정희긍선에게 ‘석전만암(石顚萬庵)’이란 글을 주며 뒷날 제자 중에서 도리를 아는 자에게 이 호를 주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글은 긍선에서 처명으로 전해졌고, 처명박한영(朴漢永)에게 법호 석전을 주었다.

구암사에서는 구한말 간재 전우가 승려 설유와 함께 불학을 연구하였으며, 많은 고승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대한 불교 지도자 영호당 대종사도 도제 양성과 근세 불교 교육을 위해 크게 진력하였던 역사적 산실이다. 재가자로는 이광수(李光洙), 서정주(徐廷柱), 신석정(辛夕汀), 조지훈(趙芝薰) 등이 있고, 출가자로는 청담, 청우, 서경보, 운허, 운성, 운기, 만암 대종사 등이 있다. 유명한 대종사를 줄줄이 배출한 교학의 중심지답게 구암사에서 저술된 책들도 많다. 긍선구암사에서 『정혜 결사문(定慧結社文)』, 『선문수경(禪門手鏡)』 등을 저술하였다고 전해져 온다.

그러나 구암사는 숲이 깊어 전란이 있을 때마다 그 국난을 몸소 겪어야 하는 것도 사실이어서 1950년 6·25 전쟁 때에 많은 빨치산들이 숨어들어 특히 불교 유적의 소실(燒失)을 많이 당하였다. 1957년 복원하였으나 1959년 다시 불에 탔고 이것을 1973년 5월에 중창하였다. 1997년에는 삼성각을 지어 오늘에 이른다.

[현황]

2014년 현재 건물로는 대웅전과 삼성각, 요사채 두 동이 있다. 대웅전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1973년에 복원된 것이고, 내부에 석가모니불을 주존으로 삼존불과 후불탱화·신중탱화·산신 탱화가 있다.

유물로는 절 입구에 상언·긍선·정관의 부도가 있다. 또 김정희가 쓴 구암사 현판과 긍선김정희가 주고받은 서간문이 남아 있었으나 6·25 전쟁 때 불에 타 사라지고 1940년에 석전이 쓴 「중수 구암사기(重修龜巖寺記)」와 김정희가 쓴 편액 몇 편만이 전한다.

[관련 문화재]

추사 김정희가 쓴 선운사 백파 율사비(禪雲寺白坡律師碑)[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22호]의 비문은 제자들에 의해 대대로 구암사에 보관되어 오다가 백파 율사의 출가 본사인 선운사에 보내져 비를 세웠다고 한다. 당시 추사백파 대종사를 높이 추앙하여 그 친필을 무수히 남겨 놓았으며, 고종 때 전라 관찰사 이경상은 백파의 선교 강설에 감동되어 대웅전을 중창하고, 정조(正租) 350석을 희사하여 사찰 전답을 매입 관리토록 하였다.

『월인석보(月印釋譜)』는 2000년에 구암사에서 제15권이 발견되어 보물 제745-10호로 지정되었다. 『월인석보』는 훈민정음이 창제된 이후 얼마 되지 않았을 때의 글자와 말을 그대로 담고 있는 불교와 관련한 최초의 언해서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매우 높은 문헌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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