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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041
한자 天主敎
분야 종교/기독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개관)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배옥영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활동하고 있는 로마가톨릭 교회.

[개설]

독일인 예수회 신부 아담 샬(Johann Adam Schall von Bell)[1591~1666]과 북경에 와 있던 소현 세자의 만남은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들어오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이때 북경으로부터 많은 서양 학술서가 들어오게 되면서 당시 정계로부터 은퇴한 남인(南人) 학자들이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신부가 북경에서 출판한 『천주실의(天主實義)』를 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학문적 관심으로 출발한 서학 탐구가 얼마 되지 않아 신앙 운동으로 전개되었고, 결국 100여 년간에 걸쳐 신유(辛酉)·기해(己亥)·병오(丙午)·병인교난(丙寅敎難)이라는 네 차례의 큰 박해를 겪게 되었다.

천주교의 전라북도 전래는 유항검윤지충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유항검은 전주 초남 사람으로 우리나라의 천주교 전래와 거의 때를 같이 하여 권일신의 집에서 문객 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1784년(정조 8) 이승훈(李承薰)이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귀국, 권일신이 입교 영세하자 그의 권유로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과 함께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고향 전주로 돌아와 가문 일족을 비롯해 사방에 전교하고자 노력하여 진산(珍山)에 살고 있는 이종사촌인 윤지충을 입교시키고 주문모 신부를 중심으로 그 기틀을 다졌다.

그러나 조상의 제사 문제로 인해 신해교난이 일어나는 빌미가 되었다. 북경 주교로부터 조상에 대한 제사는 미신 행위로 금지한다는 통지를 받은 윤지충이 1791년(정조 15)에 어머니상을 당하자 제사 지내기를 거부하며 조상의 제사를 폐지하고 신주(神主)를 불태워 땅에 묻었던 사건이 결국 천주교 탄압의 빌미를 제공하게 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전라북도 전주에 천주교 신앙의 씨를 뿌린 유항검이 순교하였지만, 이들의 포교로 전라남·북도의 경계를 이루는 호남정맥 줄기의 방장산(方丈山) 일대에는 신자촌(信者村)이 형성되었다. 특히 방장산 줄기를 따라 장성의 숙호치(宿虎峙)와 갈라지고 북이면의 여러 마을과 산길로 연결되는 무장(茂長), 갈재 일대에 천주교가 급속히 확산되었다.

신유교난으로 희생된 사람의 수는 기록에 따라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처형된 자가 100여 명, 유배된 자가 4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희생에도 불구하고, 이 일은 오히려 천주교의 확산을 불러와 순창군에 천주교가 입교하는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대부분의 신자들은 탄압을 피해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 먹고 살기 위해 옹기를 굽는 일을 해서 연명하였다.

1827년(순조 27) 전라도 곡성 덕실 마을에 있는 옹기굴의 직공들은 대부분이 천주교 신자들이었다. 이중 평소 품행이 바르지 못했던 순교자 한덕원의 아들 한벽겸이 주막에서 행패를 부리자 주막집 주인이 관가에 고발하였다. 이에 곡성 현감이 자신의 관할 지역에 천주교 신자가 있다는 사실에 대경실색하여 닥치는 대로 천주교 신자를 잡아들이고 재산을 몰수하였다. 이 옹기점 사건이 교난으로 확대되니 이 사건이 바로 정해교난이다.

사건이 확대되자 곡성 지방의 신자들이 포졸들을 피해 더욱 더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게 되었고, 곡성 지방에 그쳤던 천주교 탄압은 전라도 전역으로 확대 되었다. 순창·용담·임실·장성·전주로 확산되어 전주 감옥에 검거된 자가 240명이 넘었다고 한다. 이 박해 이후 천주교는 주로 깊은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순창 또한 산악 지역이 많고 방장산의 줄기에 이어져 있어 적지 않은 신자들이 은신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순창 지역 천주교의 전래]

육신 생활을 하기에는 불편하였으나 신앙생활을 하기에는 순창만한 곳이 없었다. 생명을 보존하고 수계를 지키며 신앙생활을 유지하고, 자녀들의 신앙 교육을 하기에는 더 없이 좋은 곳이었다. 1860년(철종 11)을 전후해서 전라도 지방 어느 곳이든 피난지가 될 만한 곳이면 교우촌이 없는 곳이 없었다.

대표적인 곳으로 순창 오룡 천주교 성지를 들 수 있는데 병인박해 때인 1866년(고종 3) 천주교 신도들이 몸을 숨긴 교우촌이다. 충청도와 변산 등지에서 감시의 눈을 피하고 있던 천주교 신도들이 좀 더 안전한 피신처를 찾다가 이곳 오룡 마을로 오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당산 자락에 머물렀으나 몇 해 뒤 지금의 공소 자리에 터전을 옮겨 공소와 숙소를 짓고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 공소는 6·25 전쟁 때 소실되고 1967년에 다시 지었다.

그 외에도 회문산이 있다. 회문산 골짜기로 이르는 곳은 외부에서 침입할 수 없는 전형적인 요새지로 천주교도들이 몸을 숨기기에도 적합하였다. 천주교 성지로서 한국 최초의 신부인 김대건(金大建) 신부가 병오박해 당시 처형당할 때 동생 김란식과 조카 김현채가 이곳 회문산에 기거하였고, 두 사람의 묘소가 안치되어 있다.

1882년(고종 19) 어은동·내동·대판이·아청이·밤송이·운행이·먹산이·움터골·갈재·시루봉에 숨어서 신앙생활을 하던 천주교 신자들이 힘을 모아 리우빌 신부와 함께 순창 지역에 공소를 건립하면서 순창에서 본격적인 천주교회의 집회가 열리기 시작하였다. 이를 계기로 1883년 서지동 공소, 1885년 추감 공소, 1886년 골안 공소를 세우고 리우빌 신부가 담당하였다. 1889년에는 개운리 오룡촌에 현 학선 공소를 설립했으며 베르모렐 신부가 부임하였다.

1890년 홀기미[홀금] 현 종암 공소, 1891년 모아동 일운이 공소, 1892년 소태정이 공소, 1893년 상서리·팔용천·한가랏 공소가 설립되었고 베르모렐 신부가 담당하였다. 1894년 농바위·사리실·국동·오천 공소가 설립되었으며 비에모 신부가 담당하였다. 1895년 라크루 신부가 담당하는 민재·한가 공소가, 1896년 옥정 공소가 설립되었다. 1897년에는 드예 신부가 담당하는 쇠도 공소가, 1901년에는 김양흥 신부가 담당하는 공근이 공소가 설립되었다.

1960년 순창군 순창읍 남계리 205번지에 건물을 세우고 천주교 순창 성당으로 승격되었으며 초대 주임에 이상호 신부가 부임하였다. 1974년에 순창군 쌍치면 소재의 오룡촌·종암리·내동·삽실 공소가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으며, 1982년 동계면 현포리 541번지에 동계 공소가 건립되었다. 그리고 1983년에 동계 공소 내에 동계 유아원이 개원되었다. 1983년 복흥 공소가 순창군 복흥면 정산리 234번지의 부지를 매입하고 시작되었으나 자금난으로 중단되었다가 1994년에야 기공식을 하게 되었다. 그와 함께 복흥 유아원이 함께 개원하게 되었다. 1997년에는 복흥 공소 어린이집이 개원하였다. 2011년 6월 5일 순창 성당 관할의 복흥 공소는 순창 복흥 성당으로 승격되었다.

[현황]

2014년 현재 전라북도 순창군의 성당으로는 순창 성당, 순창 복흥 성당, 순창 성당 관할의 동계 공소, 복흥 성당 관할의 쌍치 공소가 있다. 순창군의 천주교는 순창군 전역에서 어린이집을 운영하고 노인잔치를 여는 등 사회 어두운 곳에 빛이 되는 역할을 해 오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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