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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 대토벌 작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594
한자 南韓大討伐作戰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숙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09년 9월 1일연표보기 - 남한 대토벌 작전 개시
전개 시기/일시 1909년 9월 13일 - 구암면 창평리에서 의병 1명 체포
전개 시기/일시 1909년 9월 22일 - 복흥면 주정리, 상치등면 구산리에서 의병 출몰
전개 시기/일시 1909년 9월 29일 - 복흥면, 상치등면, 하치등면에서 의병 출몰
전개 시기/일시 1909년 10월 8일 - 의병 대장 최산흥 체포
전개 시기/일시 1909년 10월 22일 - 의병 임병수 체포
전개 시기/일시 1909년 12월 11일 - 피노리 임시 헌병 파견소 직원과 의병 3명 교전
전개 시기/일시 1910년 1월 19일 - 순창군 하치등면 피노리에서 의병 1명 체포
성격 의병 토벌 작전

[정의]

1909년 일제가 무력으로 전라북도 순창을 비롯해 남한 지역의 의병들을 초토화시키기 위해 행했던 작전.

[역사적 배경]

일제는 비옥한 토지와 항구를 갖고 있는 전라도 지역을 매우 탐냈으나 전라도 지역의 의병들 때문에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일제는 의병의 뿌리를 뽑을 생각을 했는데, 이를 남한 대토벌 작전이라 한다.

[경과]

일본군 임시 한국 파견대의 보병 2개 연대는 1909년 5월 말 부산에 상륙해서 6월 초까지 목포와 군산으로 각각 이동하였고 이후 6월 10일까지 전라남도의 군사적 거점을 점령하였다. 1909년 9월 1일부터 10월 10일까지 총 40여 일 동안 총 3기로 나누어져서 작전이 시행되었는데 이 중 1연대 작전 구역이 순창이었다.

순창 지역의 의병을 진압한 기록을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1909년 9월 13일 구암면 창평리에서 의병 한 명 체포, 1909년 9월 22일 복흥면 주정리, 상치등면 구산리에서 의병 출몰, 1909년 9월 29일 복흥면, 상치등면, 하치등면에서 의병 출몰, 1909년 10월 8일 구암면 통안리에서 의병 대장 최산흥 체포, 1909년 10월 22일 순창에서 의병 임병수 체포, 1909년 12월 9일 순창군 좌부면 후리, 우부면 장암리에서 의병 활동을 하다가 의병 1명이 순창 주재 순사에게 체포, 1909년 12월 11일 순창군 덕진면 옥일리 부근에서 피노리 임시 헌병 파견소 직원과 의병 세 명 교전, 1910년 1월 19일 순창군 하치등면 피노리에서 헌병이 의병 한 명 체포 등이다.

[결과]

황현(黃玹)의 『매천 야록(梅泉野錄)』을 보면 남한 대토벌 작전에 대하여 “사방을 그물 치듯 해놓고 마을을 집집마다 뒤져서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우면 즉시 죽였다. 이에 이르러 길에는 다니는 사람이 없고 또 이웃과도 통하지 않았다. 의병들은 흩어져 달아났으나 숨을 곳이 없어 돌격하여 싸우다가 죽고 혹은 도망치다가 칼을 맞아 죽었다. 차차 쫓기어 강진·해남 땅에 몰리어 죽은 자가 수천 명에 달하였다.”라고 기록할 정도로 매우 처참하였다.

이때 의병의 피해는 전사 420명, 체포 1,687명, 총기 피탈 455정으로 나와 있다. 본격적인 전라도 의병을 죽이는 작전은 결국 많은 피를 흘리게 되었고, 체포된 의병들은 해남~하동 간 도로 공사에 강제 투입되었다. 살아남은 의병들은 만주로 가서 독립군이 되었다. 전라도에 대한 경제적 침탈이 가속화되었고 결국 한국은 일본에 완전 병합되었다.

[의의와 평가]

일제의 침탈에 무력으로 끝까지 항거했던 의병들이 있었기에 후에 독립군, 광복군으로 이어지는 민족 자립의 역사가 이루어질 수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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