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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777
한자 高麗直提學楊首生妻烈婦李氏閭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568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승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74년연표보기 -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 건립
개축|증축 시기/일시 1850년 -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 중건
문화재 지정 일시 2000년 11월 17일연표보기 -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72호로 지정
현 소재지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568 지도보기
성격 정려문
양식 겹처마 팔작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남원 양씨 종중
관리자 남원 양씨 종중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72호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 있는 조선 후기에 세운 정려.

[개설]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高麗直提學楊首生妻烈婦李氏閭)는 나라에 큰일이 생길 때마다 땀을 흘린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판서 권성(權晟)이 지은 「열부 숙인 이씨 묘비 음기(烈婦淑人李氏墓碑陰記)」와 운계(雲溪) 황신구(黃信龜)가 지은 「열부 숙인 이씨 정려비 음기(烈婦淑人李氏旌閭碑陰記)」에 이러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 1760년 간행된 『옥천 군지』에는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쓴 「열부 이씨전(烈婦李氏傳)」이 수록되어 있다.

[위치]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국도 21호선 귀미로 구미 보건 진료소 앞에 위치해 있다.

[변천]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는 고려 직제학을 지낸 양수생(楊首生)의 처 이씨의 지조를 기리기 위해 세운 것이다. 이씨 부인은 고려 말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당시의 풍습대로 개가하라는 부모의 청을 거절하고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로 내려와 살았는데, 정려에는 그에 대한 내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씨 부인이 세상을 떠나고 부인의 행실을 알게 된 세조가 1467년(세조 13) 정려를 내려 후세 사람들에게 귀감이 되도록 하였다. 비와 정려각은 이로부터 200여 년이 지난 1774년(영조 50)에 건립되었다. 현재의 건물은 1850년(철종 1)에 중건한 것이다. 1774년 명의 망와(望瓦)[지붕 마루 끝에 세우는 암막새]가 남아 있다.

[형태]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공포는 이익공으로 매우 화려하며, 대들보 위에 선자 서까래[扇子椽]를 건 가구(架構) 구조가 특이하다. 건물의 규모는 크지 않으나, 19세기 후반의 건축 수법을 잘 보여 준다. 정려각 안에는 정려비가 있다. 비석은 높이 130㎝, 너비 58㎝, 두께 22㎝로, 재질은 화강암이다. 비문의 내용은 도암 이재가 짓고, 유언호(兪彦鎬)가 썼다. 정려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열부 이씨는 고려 직제학 양수생의 처이다. 수생이 죽었는데 이씨는 아직 나이가 어려 부모는 그가 일찍 홀로 되었음을 가엾게 여기고 시집가기를 권하였다. 그때에 이씨는 임신 중이어서 울면서 부모에게 말하기를 ‘다행히 생남(生男)을 하면 양씨의 제사가 끊어지지 않으니 해산을 한 뒤에 시집을 가도 늦지 않습니다’ 하였다. 그 후에 아들을 낳자 부모는 다시 강요하므로 이씨는 또 울면서 아뢰기를 ‘아이가 아직 젖이 떨어지지 아니하였는데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면 아이가 자랄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습니다. 하늘은 양씨의 뒤를 잇게 하였는데 내가 차마 그 뒤를 끊겠습니까? 바라건대 아이가 품안에서 벗어날 때까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였다.

아이가 자라서 능히 밥을 먹고 말을 하게 되어 이씨는 크게 의연히 말하기를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아니하고,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아니한다’ 하고 죽음으로써 다시 시집을 가지 않겠다고 하였으나 부모가 들어주지 않으므로 이씨는 자결을 하려고 하였지만 그것은 의리가 아니므로 수삼의 노비를 데리고 남편의 옛집인 남원의 별업으로 도망하여 왔다. 천리 길을 굴러 넘어지며 걸어 발은 유혈이 낭자하였다. 남원의 서쪽 교룡산 아래에서 살다가 얼마 후에 칠치의 난(漆齒之亂)을 피하여 비홍산에 올랐다. 그곳에서 순창의 귀악을 바라보고 말하기를 ‘산기가 좋구나!’ 하고 바로 가서 집을 짓고 살았다. 양씨의 자손은 그로부터 그곳에서 대대로 살게 된 것이다.

아이는 이미 성장하매 사냥을 즐기고 학업에 힘쓰지 아니하므로 하루는 이씨가 밥을 먹지 않고 이불을 둘러쓰고 누워 있으므로 아이가 밖에서 돌아와 어머니는 어디가 아프냐고 물었다. 이씨는 말하기를 ‘아픈 것이 아니다. 홀로 된 사람이 오직 너에 의지하여 네가 책을 읽고 몸을 닦아서 부모의 서업을 떨어치지 아니한 것이 나의 소망이었는데, 지금 너희 하는 일이 이러하니 바람을 이룰 수가 없게 되었으므로 나는 죽고자 한 것이다’ 하니 아이는 깨닫고 그날로 사냥 도구를 불사르고 이웃에 사는 김주서를 따라서 배워 드디어 큰 재목이 되었으니 함평 현감 휘 사보가 곧 그이다.

이씨는 늙어서 온 성의 봉양[전성지양(專城之養): 한 고을의 원으로서 그 어버이를 봉양하는 일]을 누렸으며 죽어서는 순창의 동쪽 20리[약 7.85㎞] 아래에 장(葬)하였다. 본조에서 그 정열을 아름답게 여겨 특별히 기리어 그 장지에 봉석(封石)을 하였으니, 지금도 완연하며 이 일은 『옥천지』에 실렸는데 정려를 내릴 때는 세조조라 하였다.

오호라! 동방의 풍속에 부인의 정신 불음(貞信不淫)은 모두 팔조(八條)의 가르침에 따른 것인데, 아조(我朝)의 예의는 더욱 밝아서 개가한 사람의 자손은 동서반의 관직에 오른 것을 허하지 않고 있다. 이것은 정신 불음의 가르침과 개가의 막음을 함께 지키기 위함이다. 그러나 고려 말년에는 이와 같지를 않아서 대개 세속에서도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개가하는 것이 보통 행해지는 법으로 되어 있었고, 그때는 족보 자녀록에 두 번째 남편의 이름을 싣는 것을 수치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이씨는 홀로 여기에서 빠져서 절개를 지키고 뱃속의 아들로 하여금 자라게 하여 대를 잇게 하고 지금과 같이 번성하게 하였으니, 참으로 예부터 열부라고 부른 것은 이런 것을 말한 것이다.

이씨는 송 진사 극기의 배(配) 유씨와 김 한림 문의 배 허씨와 함께 같은 시대에 나왔음은 이 또한 어찌 하늘이 우리나라에 문명의 운을 열어 주기 위한 것이라고 아니하겠는가? 양씨의 자손에 참으로 뛰어난 사람이 많았지만 아직은 사계(沙溪)나 이 송자(宋者)와 같은 이는 나오지 아니하였는데 구양자(歐陽子)가 말한 바와 같이 위선(爲善)에 보답이 없을 리가 없으니 그 시기의 빠르고 더딤에 어찌 상관이 있겠느냐!

내가 요사이 듣자니 그 장지에 투장(偸葬)[남의 산이나 묏자리에 몰래 자기 집안의 묘를 쓰는 일] 수총(數塚)이 있는데 법관이 오래된 것이라고 그대로 두고 있다 하니 지금 절개를 높이고 악을 징계하는 이 세상에서 장차 어찌하면 이런 일을 다시 보지 않을까? 참으로 한탄스럽다. 후손 응수는 독지 향학하여 나를 따라 노는데, 나는 전에 이 일을 들어서 자세히 알고 있었기에 이제 전기로 써서 후세에 드리우고자 하니 이것은 하늘에서 타고난 덕을 기리는 마음에서 오래도록 사그라지지 않게 하기 위해서이다.

[현황]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 주위는 돌로 낮은 난간을 둘렀으며, 주변에 보호수가 자리하고 있다. 2000년 11월 17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남원 양씨(南原楊氏) 종중에서 소유, 관리하고 있으며 보존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의의와 평가]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의 침입 등을 살펴볼 때 열부 이씨는 1380년 남원 황산대첩 당시 남원에서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로 피신한 것으로 추측된다.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는 젊은 나이에 재가하지 않고 자기희생으로 부도(婦道)를 다한 이씨의 열행을 높이는 동시에 구미리 남원 양씨 세거의 중심적인 구실을 하는 유적지이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