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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양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862
한자 南原楊氏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이성용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세거|집성지 남원 양씨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지도보기|인계면 도룡리지도보기|인계면 중산리지도보기|인계면 노동리지도보기|금과면 고례리지도보기|구림면 연산리|적성면 운림리지도보기|적성면 내월리지도보기|적성면 평남리지도보기
성씨시조 양경문(楊敬文)
입향시조 양사보(楊思補)

[정의]

양경문을 시조로 하고 양사보를 입향조로 하는 전라북도 순창군 세거 성씨.

[개설]

남원 양씨(南原楊氏)는 시조 지영월군사(知寧越郡事) 양경문(楊敬文)부터 8세손까지 황해북도 개성 돌거개에서 거주하였다. 순창 지역 입향조 양사보(楊思輔)가 사마시에 합격하고 함평 현감을 지내는 등 가문을 일으킨 이래 문과 급제 8명, 무과 급제 10명, 생원과 진사 30명을 배출하였다. 2000년 현재 순창군의 남원 양씨김해 김씨(金海金氏), 전주 이씨(全州李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광산 김씨(光山金氏)에 이어 인구 순위 5위로 361가구나 되는 대성이다.

[연원]

양씨는 중국 성씨로, 당숙우(唐叔虞)의 후손 백교(伯僑)가 진(晋)나라에서 주(周)나라로 가 양후(楊侯)에 봉해지면서 양씨가 되었다고 한다. 양씨의 본관은 문헌에 47본으로 나타나 있으나 남원, 청주(淸州), 중화(中和), 밀양(密陽), 안악(安岳), 통주(通州) 등의 6본을 제외한 나머지 41본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없다. 통주 양씨를 제외한 5본의 양씨는 일반적으로 그 근원이 같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분파의 연원에 대해서는 명확한 설이 없다. 『청주 양씨 세보(淸州楊氏世譜)』에 따르면 양기(楊起)의 여섯 아들 중 셋째 양만수(楊萬壽)가 안악으로, 여섯째 양포(楊浦)가 중화로, 다섯째 양근(楊根)의 첫째 아들 양문(楊文)이 밀양으로, 양근의 둘째 아들 양경문(楊敬文)이 남원으로 각각 분관하였다고 한다.

『남원 양씨 족보(南原楊氏族譜)』에 따르면 양경문은 고려 시대 지영월군사를 지냈다. 그 뒤 소목(昭穆)[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은 확실하지 않으나, 9세 대제학 양이시(楊以時)에 이르러 크게 번창하였다. 2세부터 5세까지 자세한 기록이 없어 1355년(공민왕 4) 문과에 급제하여 지신사(知申事)를 거쳐 집현전 대제학을 지낸 양이시를 중조로 삼는다. 목은(牧隱) 이색(李穡)의 『제용재기(濟用財記)』에 양이시는 남원 사람이라고 기록하고 있어 남원 양씨의 관향이 남원임을 알 수 있고, 남원에서 여러 대에 걸쳐 세거해 온 까닭에 토착 양씨라고 널리 알려져 왔다.

[입향 경위]

양이시의 며느리이자 10세 양수생(楊首生)의 부인인 숙인 이씨(淑人李氏)는 1379년(우왕 5) 시아버지와 남편을 한 해 사이에 모두 사별하였다. 당시 임신 중이었던 이씨 부인은 얼마 후 아들을 낳았는데, 그가 바로 11세손 양사보이다. 친정에서는 강력하게 개가를 권하였으나 이씨 부인은 두 지아비를 섬길 수 없다며 남원 교룡산 아래 남편의 옛집으로 갔다. 가진 것이라고는 시아버지와 남편의 문과 합격증인 2종의 홍패(紅牌)와 1세조 양경문부터 8세손 양서령까지의 족보가 전부였다. 이씨 부인이 남원에 내려와 자리를 잡자마자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都)가 운봉으로 쳐들어왔다. 이에 이씨 부인양사보를 데리고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로 입향하였다.

양사보태종 조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함평 현감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인 봉정대부 판관공(判官公) 양연(楊淵)도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주 판관과 내선시 판관을 지냈다. 양연의 큰아들 임피공(臨陂公) 양자첨(楊子瞻)은 사마시에 합격하고 흥덕 현감과 임피 현령을 지냈고, 둘째 아들 귀은(龜隱) 양자유(楊子由)는 1468년(세조 14)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 한림을 거쳐 사헌부의 지평, 장령, 집의에 이르렀다. 성종 조에 지평으로 있으면서 성종이 성년이 되었는데도 수렴청정을 고집하고 친정 체제로 돌아가는 것을 반대한 영의정 한명회(韓明澮)를 파직시켜야 한다는 상소를 올린 바 있다.

14세는 사헌부 장령 귀암공(龜岩公) 양배(楊培)이며, 양배의 아들인 양공준(楊公俊)은 1520년(중종 15) 문과에 급제하여 호조 좌랑에 이르렀으나 불행히 요절하였다. 그의 아들 양호재(養浩齋) 양홍(楊洪)은 1540년(중종 35) 문과에 급제하여 선산 부사, 사복시 부정을 지냈다. 양홍의 아들 어은(漁隱) 양사형(楊士衡)은 1588년(선조 21)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 영광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으고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과 함께 왜적을 치는 데 공을 세워 선무원종 2등 공신에 녹훈되고, 도승지에 증직되었으며, 화산 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양사형의 아들 귀은(龜隱) 양시진(楊時晉)은 1606년(선조 39)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 사헌부 지평, 사간원 정언, 성절사 서장관 등을 역임하였는데, 소명국(蘇鳴國)의 모함으로 능창군(綾昌君)을 세우려 하였다는 역모에 연루되어 함흥으로 귀양 가던 도중에 죽었다. 뒤에 신원되고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양사형의 조카인 양시정(楊時鼎)은 1624년(인조 2) 문과에 급제하여 충청 도사, 성균관 사예에 이르렀다. 양시정의 5세손인 양몽인(楊夢寅)은 1740년(영조 16)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관 사성을 지냈다. 현대 유명 인물로는 양순직[국회 의원], 양찬우[내무부 장관, 국회 의원] 등이 있다. 순창의 남원 양씨는 11세 양사보가 입향한 이래 32세 양대우(楊大雨)까지 600여 년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서 세계를 이어 오고 있다.

[현황]

동계면 구미리는 한때 남원 양씨 300여 가구가 넘게 사는 큰 마을이었으며, 1960년대 구미 초등학교가 설립되었을 때는 학생 모두가 남원 양씨로 전국에서 유일한 씨족 학교라고 알려지기도 하였다. 구미에서 약 4㎞ 떨어진 어치리에는 구미리에서 옮겨 간 남원 양씨 15가구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고 있다. 인계면 중산리에는 28가구가 사는데, 이들은 쌍매당(雙梅堂) 양사민(楊士敏)의 손자인 사의 양여집(楊汝輯)의 후손들로 영조(英祖) 연간 이 마을에 들어와 세거하고 있다. 또 인계면 동촌에는 양사민(楊士敏)의 아들 양시순(楊時順)이 인조(仁祖) 연간에 들어와 그 후손이 세거해 왔다.

금과면 고례리에는 순조(純祖) 연간에 구미리에서 들어온 양영환(楊永煥)의 자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양영환의 아들 예암(禮庵) 양재영(楊在榮)은 선공감 가감역을 지냈으며, 그의 아들 만오(晩悟) 양석승(楊錫升)은 참봉을 지냈다. 영광 군수를 지낸 양사형이 구림면 연산 마을로 분가하였고, 지금도 그 자손이 세거하고 있다. 특히 양사형이 지은 어은정(漁隱亭)이 이 마을 옆 섬진강 가에 있어 군민의 휴식처가 되고 있다. 귀남에서 1㎞쯤 떨어진 우계(愚溪) 마을에는 양사형의 손자인 화양(華陽) 양여매(楊汝梅)가 귀남에서 이거하였다. 여기에서 또 1㎞쯤 떨어진 시목 마을에는 양여매의 아들 양염거(楊廉擧)의 후손이 세거하고 있다.

[관련 유적]

1. 남원 양씨 종중 문서 일괄

보물 제725호로 지정된 ‘남원 양씨 종중 문서 일괄(南原楊氏宗中文書一括)’은 국립 전주 박물관이 관리하고 있다. 남원 양씨 종중 문서 일괄은 1355년(공민왕 4)부터 1591년(선조 24)까지의 고문서 7매이다. 양수생의 처 이씨 부인이 개성에서 가져왔던 것으로, 양이시가 1355년 과거에 합격하였음을 알리는 합격 증서인 홍패(紅牌)와 그의 아들 양수생 역시 1376년(우왕 2) 문과에 급제하였음을 알리는 홍패 등 2건을 주축으로 하고 있다.

이 외에도 양공준(楊公俊)이 1508년(중종 3) 생원시에 급제하였다는 교지와 문과 급제 교지, 생원 양홍이 1540년(중종 35) 문과에 합격하였다는 교지, 그리고 양시성이 1591년(선조 24) 생원시에 급제하였다는 교지 등의 합격증서가 있으며, 1559년(명종 14) 양홍을 청도 군수로 임명한다는 발령장인 사령 교지도 있다.

이들 문서는 고려 후기에서 조선 전기 홍패·백패 연구에 중요한 자료인데, 특히 양이시 급제 홍패와 양수생 급제 홍패는 조선 시대 합격 증서에 교지라 쓴 것과는 달리 왕명이라 기록되어 있으며, 시험관의 관직, 성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문서의 형식 및 고려 시대 과거 제도 연구에 매우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2.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

고려 직제학 양수생 처 열부 이씨려(高麗直提學楊首生妻烈婦李氏閭)’는 2000년 11월 17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72호로 지정되었다. 고려 후기 직제학을 지낸 양수생의 처 이씨에게 내린 정려이다. 이씨가 남편을 여의고 개경을 떠나 지금의 동계면 구미리에 터를 잡고 살게 된 내력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정려는 1467년(세조 13)에 내려졌고, 비와 비각은 1774년(영조 50) 건립되었다가 1850년(철종 1) 중건되었다.

정려각은 정면 한 칸, 측면 한 칸의 겹처마로 된 팔작지붕 건물이다. 공포는 두 개의 익공으로 매우 화려하며, 내부의 대들보 위에 부챗살 모양의 선자 서까래를 걸었다. 정려각 안의 정려비는 높이 205㎝, 너비 58㎝, 두께 22㎝의 화강암으로 되어 있고, 덮개돌[蓋石]을 갖추었다. 이씨 부인에 관한 기록은 1670년(영조 36) 『옥천 군지(玉川郡誌)』도암(陶庵) 이재(李縡)가 쓴 「열부 이씨전(烈婦李氏傳)」에서 볼 수 있다. 2014년 현재 남원 양씨 추원재 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하고 있다.

3. 어은정구암정

어은정은 1990년 6월 30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32호로 지정되었다. 양사형이 1567년(명종 22) 동계면 구미리에서 적성면 평남리로 분가하여 살면서 지은 누각으로 원래 이름은 영하정(暎霞亭)이었다. 영하정은 그 뒤 후손들에 의해 여러 차례 중건되면서 이름도 어은정으로 바뀌었다. 현재의 누각은 1919년 중건된 것으로,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규모이다. 1991년 기와를 교체하고 목재 부분도 일부 보수하였다. 강 언덕에 자리 잡은 누각 주위로 백일홍 수십 그루가 심어져 있어 꽃이 피는 계절이면 장관을 이룬다.

구암정(龜岩亭)은 1990년 6월 30일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31호로 지정되었다. 조선 시대 학자 양배(楊培)를 추모하기 위하여 1901년 후손들이 정자를 짓고 그의 호를 따서 구암정이라 불렀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으로 남원 양씨 대종회에서 보호, 관리하고 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