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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말주선생의십로계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826
한자 申末舟先生-十老契帖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유물/서화류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남산길 32-3[가남리 518-1]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김태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제작 시기/일시 1499년연표보기 - 신말주, 십로계첩 제작
모사본 제작 시기/일시 1790년 - 신말주선생의십로계첩 김홍도가 모사
문화재 지정 일시 1992년 6월 20일연표보기 - 신말주선생의십로계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
문화재 지정 일시 2021년 11월 19일 - 신말주선생의십로계첩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재지정
현 소장처 귀래정 신말주 선생 후손 세거지 - 전라북도 순창군 순창읍 남산길 32-3[가남리 518-1]지도보기
성격 고도서|화첩
작가 신말주
서체/기법 수묵 백묘법
소유자 신길수
관리자 신길수
문화재 지정 번호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정의]

전라북도 순창에 은거한 조선 전기의 문신 신말주가 십로계에 관한 사항을 정리한 화첩.

[개설]

신말주(申末舟)[1429~1503]의 본관은 고령, 자는 자즙(子楫), 호는 귀래정(歸來亭)이다. 1429년(세종 11) 서울에서 출생했으며, 형은 신숙주(申叔舟)이다. 단종 대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로에 나갔으나 세조단종을 폐위함을 옳게 여기지 않아 벼슬을 버리고 아내 설씨 부인의 고향인 순창에 내려와 정착하였다. 그 후로 후손들이 순창군 순창읍 가남리 남산대에 신씨 집성촌을 이루게 되었다.

신말주는 노년에 이르러 순창에서 지기상합(志氣相合)한 노인 9명과 계회를 맺어 ‘십로계(十老契)’라 이름하였다. 계의 연유와 목적, 성격, 행동 등을 적은 서문을 쓰고, 여기에 본인을 포함한 10명의 노인들의 인물도를 그리고 경구시를 첨부한 것이 이 십로계첩(十老契帖)이다. 서문과 도형을 쓴 계첩(契帖) 10벌을 만들어 각각 그 후손들에게 나누어 주었으나 다른 계첩은 찾을 수 없고 원작 첩질인 신말주의 것만 현재 후손인 신길수가 보관하고 있다. 남원 장조평(張肇平)의 사당인 십로사(十老祠)에 소장된 것이 있었다 하는데 8·15 광복 후에 도난당하여 행방을 알 수 없다. 신말주가(申末舟家)의 계첩 또한 분실되었으나 그것을 다시 찾은 기연은 다음과 같다.

신말주의 8세손인 신후정(申後棖)이 화탄(花灘)[순창군 유등면]가에 살았는데, 어떤 노승이 문을 두드렸다. ‘이곳이 신씨 집입니까?’라 함에 ‘그렇습니다.’라 하니 그 중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며 ‘저는 십로계 중 이 아무개 후손입니다. 제 선조의 후손 중에 이제 저 한 사람만 남았습니다. 그래서 이 계축을 사서 안고 산중으로 이리저리 어렵게 생활하면서 지금까지 이것을 잘 보관하고 있습니다. 지금 제 나이가 여든입니다. 이제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았으나 딱히 이것을 줄 사람도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생의 수적(手跡)입니다. 그러니 선생의 후손들에게 가야 합니다. 그래서 이 계축을 가지고 왔습니다.’라 하고서는 화축을 꺼내서 바쳤다.”[신경준, 「십로계축 후서(十老契軸後敍)」『여암 유고(旅庵遺稿)』 권5].

이 내용은 신말주의 10세손인 신경준(申景濬)[1712~1781]이 1731년(영조 7)에 다른 성씨 기로(耆老)의 후손이 소장하고 있던 십로계축 중의 한 본을 전해 받은 기연을 70세가 된 1781년(정조 5)에 적은 것이다. 신말주선생의십로계첩은 1992년 6월 20일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전라북도 유형문화재로 재지정되었다.

[형태 및 구성]

십로계첩은 1499년(연산군 5)에 신말주가 직접 그린 그림과 시 10점을 모아 엮은 첩본이다. 전문 420자로, 신말주가 처음 작성할 때는 가로 12.5㎝, 세로 28.5㎝인 종이 11장에 매첩 4행 12자로 각 개인의 해학적인 칠언 절구(七言絶句)를 적었다. 그중 1첩에는 2행 14자로 서문을 적었는데 가로 18.5㎝, 세로 23㎝ 크기에 계를 맺은 연유, 목적, 성격, 행동 등이 기록되어 있고, 또한 10명의 인물도를 그린 후 각 개인의 생활과 인격, 사상과 함께 계훈적인 절구시(絶句詩)를 적어 넣었다.

현재 십로계첩과 관련되어 남아 있는 그림은 삼성 미술관 리움 소장본[권],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142호 고령 신씨 가전본[첩], 1790년 김홍도 모사본 「십로 도상도(十老圖像圖)」[첩, 호암 미술관 소장], 1997 한국 고미술 대전에 출품된 후모본[첩], 2009년 5월 서울 인사동 화랑 고도사에 전시된 개인 소장의 후모본[첩] 이 5점이다. 이 중에서 고령 신씨 가전본은 서문과 그림으로 구성되어 있고 첩의 형태로 장황(粧䌙)되어 있다. 그림의 형태는 첩의 각 면 위에 작은 그림을 잘라 붙인 형태이고, 그림의 끝부분이 잘린 곳도 확인된다. 따라서 원래 두루마리[축(軸)] 형태였던 것을 첩으로 개장한 것으로 보인다. 그림 부분의 화면은 세로가 가로보다 약간 길지만 거의 정사각형에 가깝다.

십로계첩에 기록된 10명은 생년월일 순으로 서열을 메기고 나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시작하여 차례로 돌아가면서 모임을 주관하였다. 모임을 여는 순서가 한 바퀴 돌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는 방식이었다. 순서대로 나열해 보면, 이윤철(李允哲)-안정(安正)-김박(金博)-한승유(韓承愈)-설산옥(薛山玉)-설존의(薛存義)-오유경(吳惟敬)-신말주-조윤옥(趙潤屋)-장조평의 순이다.

[특징]

십로계첩은 한 장에 인물 한 명을 배치하고 기물이나 배경은 소나무, 시녀, 바위 등으로 최소화하였다. 화면 상단에는 각 인물의 생활·인격·사상 등을 읊은 4행의 시를 적었다. 산수화 위주에 계회 장면을 작게 표현한 16세기 궁중의 계회도(契會圖)와는 달리 인물 위주로 표현한 점이 특징이다. 대부분 수염이 기다란 노인이 방석 위에 앉아 있는데, 흥에 겨워 덩실덩실 춤을 추거나 술을 이기지 못하고 드러누운 경우도 있다.

그림의 기법은 수묵으로 그린 백묘법(白描法)[동양화에서, 진하고 흐린 곳이 없이 먹으로 선만을 그리는 화법]이며 필선이 매끄럽지는 않다. 인물의 표현은 곡선 위주로 묘사하였고, 붓의 첫머리에 약한 정두(頂頭)를 세웠다.

[의의와 평가]

계회도로는 제작 시기가 이른 것에 속하고 궁중의 공식적인 모임인 계회도가 아닌 문인들의 사적인 계회를 그린 기록화라는 점에서 회화사적 가치가 있는 자료이며, 당시 노인들의 근세적 생활과 사상, 당대의 정치·사회·풍습을 엿볼 수 있는 자료로 평가된다.

『논어(論語)』 위정(爲政) 편에서는 “일흔이 되어서는 무엇이든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법도에 어긋나지 않았다[七十而從心所欲不踰矩]”라고 하여 뜻대로 하여도 도리에 어긋나지 않는 나이를 ‘종심(從心)’이라 하였다. 또한 옛날에는 평균 수명이 짧아 80세 이상 사는 경우는 거의 드물었다. 심지어 70세까지만 살아도 장수한 것으로 여겨 중국 당나라의 시인 두보(杜甫)도 「곡강시(曲江詩)」에서 “사람이 70까지 사는 것은 예부터 드물었다[人生七十古來稀]”고 하여 70세를 ‘고희(古稀)’라고도 부른다. 이와 같이 당시 70세가 넘은 노인 10명이 모여 계를 형성하였다고 하는 점은 후대에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신말주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후대의 자손들에게 경책(警責)을 삼게 하기 위한 의도가 가장 크다고 할 것이다.

또한 십로계첩의 화풍이 『설씨 부인 권선문』의 ‘광덕산 부도암도(廣德山浮圖庵圖)’의 것과 유사하여 십로계첩의 그림을 설씨 부인이 그렸을 가능성이 제기되기도 하였고, 설씨 부인이 아닌 다른 사람의 작품으로 보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인물도의 작가가 누구이냐의 문제는 10점 중 현재 단 한 점만 남아 있는 상황에서 정확한 판단을 내리기에는 부족한 면이 많다. 추후 다른 작품이 발굴되었을 때 온전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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