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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042
한자 金炳魯
이칭/별칭 소석(小石),가인(街人)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임숙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87년 12월 15일연표보기 - 김병로 출생
수학 시기/일시 1913년 - 김병로 메이지 대학 법과 졸업
활동 시기/일시 1913년 - 김병로 학지광(學之光) 편집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14년 - 김병로 변호사 시험 합격
활동 시기/일시 1916년 - 김병로 경성 법학 전문학교 조교수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17년 - 김병로 보성전문학교 강사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18년 - 김병로 경성 지방법원 소속의 변호사로 개업
활동 시기/일시 1922년 - 김병로 조선 민립대학 기성회 발기인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27년 - 김병로 신간회 중앙 집행 위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5년 - 김병로 한국 민주당 중앙 감찰 위원장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46년 - 김병로 남조선 과도 정부 사법부장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48년 -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53년 - 김병로 2대 대법원장 부임
활동 시기/일시 1955년 - 김병로 고려 대학교 명예 법학 박사학위 취득
활동 시기/일시 1960년 - 김병로 자유 법조단 대표 역임
활동 시기/일시 1962년 - 김병로 문화 훈장 대한민국장과 건국 공로 훈장 수여
추모 시기/일시 1962년 - 김병로 문화 훈장 추서
활동 시기/일시 1963년 - 김병로 민정당 대표 최고 위원 역임
추모 시기/일시 1963년연표보기 - 김병로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몰년 시기/일시 1963년 1월 13일연표보기 - 김병로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99년연표보기 - 김병로 동상 건립
출생지 김병로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묘소 김병로 묘소 -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 4동 산 127-1
성격 정치가|법관
성별
본관 울산(蔚山)
대표 경력 초대 대법원장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의 법관이자 정치가.

[가계]

본관은 울산(蔚山). 호는 가인(佳人).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김학수, 아버지는 사간원 정언(司諫院正言)을 지낸 김상희(金相熙)이다. 어머니는 장흥 고씨(長興髙氏)이다. 처는 연일 정씨(延日 鄭氏) 정교원의 딸이다. 자식은 3남 1녀로 장남 김재중, 장녀 김순남, 차남 김재열, 삼남 김재옥이다.

[활동 사항]

1. 일제 강점기

1) 의병 활동과 유학 생활

김병로(金炳魯)[1887~1963]는 1887년 순창군 복흥면 사창리에서 1남 2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8세 때인 1894년 할아버지 김학수가, 이듬해 1895년에는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다. 1899년 13세의 나이로 네 살 연상인 연일 정씨와 결혼하였다. 어릴 적 스스로 소석(小石)이라 불렀는데 옛 글에서 “남자란 담은 크되 마음은 작게 하여 몸을 귀하게 하라”에서 따온 말이다. 스스로 체구가 크지 못하고 마음도 심약하다 여겨 붙인 이름이었다. 후에 독립을 원하는 마음과 현실을 개탄하는 뜻에서 가인(街人)이라 별호를 바꾸었다고 1957년 4월 14일 『동아 일보』 사설에서 밝혔다.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이 체결됨에 따라 각지에서 의병들이 분연히 일어나는데, 최익현(崔益鉉)이 의병을 일으키자 김병로채상순(蔡相淳) 등 5~6명의 포수들과 함께 의병 부대에 가담하였다. 최익현의 부대가 해산된 뒤에는 고향에서 광양의 백낙구(白樂九, 白樂龜), 담양의 기우만(奇宇萬)·이낙범(李洛凡), 정읍의 유의삼(劉義三)·유화숙, 운봉의 박문달(朴文達) 등과 함께 의병 투쟁을 계획하였고, 그 뒤 김동신 의병 부대에 합류하여 순창에 있는 일인 보좌청(日人補佐廳)을 습격하였다.

이후 고정주(高鼎柱)가 설립한 창흥 의숙(昌興義塾) 고등과 속성 과정에 입학하고 졸업 후 1910년에는 일본 도쿄로 유학을 떠났다. 니혼 대학[日本大學]과 메이지 대학[明治大學] 야간부 법학과에 입학하여 동시에 두 학교를 다니다가 폐결핵 치료차 잠시 귀국하였다. 1912년 다시 일본으로 가 메이지 대학 3학년에 편입하였다. 이 2차 도일 기간 중에 김병로는 일요일마다 재동경 조선인 유학생 학우회(在東京朝鮮人留學生學友會) 집회에 나가 재일 유학생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활동을 하였다. 1913년에 메이지 대학을 졸업하고 1914년 주오 대학[中央大學] 고등 연구과(高等硏究科)를 다니면서는 『학지광(學之光)』 편집자로서 활동하였으며 금연회를 조직하여 유학생에게 장학금을 보조하기도 했다.

2) 법조인으로서의 활동

1915년 귀국해서는 경성 전수 학교(京城專修學校) 조교수와 보성 전문(普城專門)의 강사를 지내며 사법 협회 기관지 『법학계』의 편집을 맡았다. 1919년 경성전구학교 조교수를 사임한 후 부산 지방 법원 밀양 지원 판사가 되었으나 1년 만에 그만두고 변호사 개업을 하였다. 이후 1924년에는 조선 변호사 협회 이사장을 맡았다.

김병로의 일제 강점기 활동 중 가장 두드러진 점은 독립운동가들을 위한 무료 변호를 많이 하였다는 점인데, 그가 맡은 독립운동가들의 애국 활동을 보면 1921년 보합단(普合團) 사건, 1923년 김상옥 의사 사건, 제2차 의열단 사건, 1926년 6·10 만세 사건, 1927년 제1차 조선 공산당 사건, 고려 혁명당 사건, 정의부(正義府) 사건, 1928년 제1차 간도 공산당 사건, 1929년 대구 학생 비밀 결사 사건, 통의부(統義府) 사건, 1930년 광주 학생 독립 운동, 제3차 조선 공산당 사건, 수원 고등 농림 학교 흥농사(興農社) 사건, 1931년 제3차 간도 공산당 사건, 1937년 수양 동우회(修養同友會) 사건 등이 있었다. 이러한 시국 사건 외에도 1928년 옥구 소작 쟁의 관련자, 1929년 원산 파업 노동자, 1929년 진주 노동조합 사건 관련자들의 변호를 하기도 하였다.

김병로의 사회 활동은 변호인으로서 활동에만 국한되지 않고 활발하게 나타나는데 1920년 조선 교육 협회 창립 발기인, 1921년 동아일보사 법률 고문, 1922년 보성 전문 학교 상임 이사, 1923년 조선 민립 대학 기성회 발기인 및 조선 물산 장려 운동 1924년 조선 중앙 기독교 청년회 학관 산하 고등 보통학교 기성회 발기인, 1931년 충무공 유적 보존 운동 기금 관리 위원 등을 맡는 등 적극적인 사회 활동을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적극적 활동은 일제의 탄압이 거세지면서 1931년에는 6개월 동안 변호사 정직 처분을 불러오게 되었다. 결국 1934년에는 경기도 양주에서 농사를 지으며 광복이 되기까지 13년간 칩거하였다.

2. 광복 이후

광복이 되자 한국 민주당[한민당] 창당에 참여하여 창당 발기 위원, 임시 의장, 중앙 감찰 위원장, 서울 지부 집행 위원장, 법제 조사 분과 위원장 등을 지냈다. 1946년 비상 국민 회의 임시 의장, 민족 통일 총본부 간부, 사법부장을 맡았고 1947년에는 도산 기념 사업회 발기인, 민족 자주 연맹 결성 준비 위원회 위원 등을 맡았다. 1948년 8월 5일에는 법무부 장관 이인(李仁)의 추천에 의하여 대한민국 초대 대법원장에 임명되었고, 법전 편찬 위원회 위원장도 같이 맡게 되었다.

그러나 이렇게 이승만 정권에서 요직을 맡았음에도 이승만과의 관계는 좋지 않았다. 첫 번째 마찰은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에서 시작되었다. 김병로는 1949년 반민족 행위 특별 조사 위원회 특별 재판부 재판관장을 맡아 반민족 행위자들 처벌에 적극적인 움직임을 보였다. 그러나 반민족 행위자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대통령과 마찰이 일어났다. 6·25 전쟁이 끝나고도 이승만김병로의 마찰은 끝나지 않았다. 1950년 3월 국회 프락치 사건에서는 빨갱이로 몰렸던 국회의원들에게 당시 사회 분위기와 다르게 징역 3년에서 10년형으로 가벼운 형벌을 내렸으며, 1954년 ‘사사오입(四捨五入) 개헌’과 1956년 이승만 대통령의 ‘판사의 월권행위’ 유감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비판하였다. 김병로의 이러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비판적 행동은 EBS 지식 채널 ‘대법원장의 말’ 편으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1957년 12월 대법원장에서 정년 퇴임한 이후로도 정부에 대한 비판은 멈추지 않았다. 1958년에는 법관 회의의 대법원장 제청권을 없애려고 하는 정부를 규탄하였으며 1959년에는 민권 수호 국민 연맹 고문과 재일 동포 송북 반대 국민 위원회 고문을 맡았다. 4·19 혁명 이후 전라북도 순창에서 자유 법조단 대표로 제 5대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였다. 이때 선거는 순창 특산품인 고추장보다 맵다는 세간의 평가가 있었는데 민주당의 홍영기(洪英基)와의 대결이 뜨거웠기 때문이었다. 여기서 김병로는 낙선하였다. 김병로의 정치계 진출은 이뿐이 아니었다. 1960년 8월 12일 국회에서 치러진 대한민국 4대 대통령 간접 선거에도 출마하였는데 1표만 득표하여 낙선되고 말았다.

5·16 군사 정변 이후에는 박정희의 민정 참여를 반대하였으며, 『사상계』에 ‘군정 연장과 국민 투표에 대하여’를 기고한 뒤 군정 종식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1963년에는 민정당 대표 최고 위원과 국민의 당 창당에 참여하여 대표 최고 위원을 역임하였다. 활발한 활동을 벌이던 김병로는 1963년 1월 13일 자택에서 간장염으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김병로는 퇴임 이후 글로써 사회 참여 활동을 활발히 하였는데 대표적인 글로는 1957년 1월 1일 『동아 일보』에 「통일에 일보 전진」, 1959년 1월 1일 『동아 일보』에 「국민 권리 수호(國民權利守護)하자. 온갖 불법 부정을 척결」, 1960년 8월 20일 『동아 일보』에 「장 내각에 바란다」 등이 있다.

[묘소]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 4동 산 127-1에 있다.

[상훈과 추모]

김병로는 1962년 문화 훈장, 1963년 건국 훈장 독립장을 수여받았다. 사후인 1999년 전라북도 전주 덕진 공원에 동상이 건립되었으며 2008년 8월 학술지 『한국사 시민 강좌』[43호]에서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특집 ‘대한민국을 세운 사람들’을 선발하였는데, 이때 건국의 기초를 다진 32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2010년에는 전라북도 순창군에 대법원 가인 연수관이 개관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1.05.17 사망연도 수정 1964년 → 19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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