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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040
한자 金洞面
이칭/별칭 금동방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제도/법령과 제도,지명/고지명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금과면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박노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고지명

[정의]

조선 후기 전라북도 순창군에 있던 지방 행정 구역.

[개설]

금동면(金洞面)은 금동방(金洞坊)이라고도 하였다.

[관련 기록]

1758년(영조 34)에 발간된 『순창군 읍지(淳昌郡邑誌)』에는 금동방이 군의 서남쪽 약 7.85㎞[20리]에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1760년에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는 금동방이 군 서남쪽 약 7.85㎞에 있으며 리 11개, 호구(戶口) 342호라고 되어 있다. 영조 대에 발간된 『여지도서(輿地圖書)』에는 서남쪽으로 금동면은 관아에서 약 7.85㎞ 떨어져 있으며, 민호(民戶)[민가]는 341호에 남자 489명, 여자 697명이라고 되어 있다.

1789년(정조 13)에 발간된 『호구 총수(戶口總數)』에는 금동면이며 고산리(高山里)·신기촌(新基村)·옹점리(瓮店里)·벌고개리(伐古介里)·청룡리(靑龍里)·돌고개리(乭古介里)·동전리(銅田里)·내동리(內洞里)·금왕리(金旺里)·발산리(鉢山里)·수양정리(崜楊亭里)·대총리(大塚里) 등 12개리가 있다. 호구는 318호에 인구는 1,224명으로 남자 453명, 여자 771명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대동지지(大東地志)』에는 금동(金洞)이 남쪽으로 처음이 약 5.89㎞[15리], 끝이 약 11.78㎞[30리]라고 하였다.

[변천]

1897년(고종 34)에 방(坊)을 면으로 고치면서 금동방을 금동면으로 바꾸었다. 1914년에 일제가 행정 구역을 개편하면서 정리한 『신구 대조 조선 전도 부군면리동 명칭 일람(新舊對照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에 의하면 과거 순창군 금동면의 수양리(水楊里)·고산동(高山洞)의 일부가 수양리, 발산리·산수동(山水洞)이 발산리, 내동(內洞)·연화촌(蓮花村)이 내동리, 동전리·만촌(蔓村)·대장리(大場里)와 목과면 모정리(茅亭里)의 일부가 동전리, 방성리(訪聖里)·석현리(石峴里)와 목과동면 남계리(南溪里)의 일부가 방성리, 청룡리는 그대로 청룡리, 금현리(金峴里)·대각리(大角里)·을장동(乙場洞)·고산동 일부가 대성리(大星里), 목과동면 모정리와 금동면 대장리 일부가 모정리로 바뀌었다. 이때 금동면과 목과면이 합해져서 금과면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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