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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익 순창 양민 학살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078
한자 左翼淳昌良民虐殺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주철희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50년 7월연표보기 - 좌익에 의한 순창 양민 학살 사건 발생
발단 시기/일시 1950년 7월 23일 - 인민군 제4사단에 의해 순창군 점령
전개 시기/일시 1950년 10월 - 회문산, 국사봉 일대 빨치산 순창 군민 학살
종결 시기/일시 1951년 5월연표보기 - 좌익에 의한 순창 양민 학살 사건 종결
성격 민간인 학살 사건
관련 인물/단체 빨치산

[정의]

1950년 7월 말부터 1951년 5월까지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등 9개 면에서 좌익과 빨치산 세력에 의해 민간인과 경찰이 희생된 사건.

[역사적 배경]

1948년 여수·순천 사건[여순 사건] 발생 이후 조계산을 근거지로 한 인민 유격대 제2병단이 순창군 회문산, 국사봉, 용궐산[지명 변경 전 명칭: 용골산] 등에서 활동을 개시하자, 6·25 전쟁 이전부터 순창 지역에서 빨치산을 토벌하려는 군경의 작전이 있었다. 6·25 전쟁이 발발하면서 순창군이 1950년 7월 23일 인민군 제4사단에 의해 점령당했으나, 1950년 9월 28일 서울 수복과 함께 10월 1일 순창 경찰서도 수복되었다. 조선 노동당 전라북도 도당 사령부회문산에 구축하면서 복흥면, 쌍치면, 구림면, 동계면을 거점으로 빨치산이 활동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빨치산과 지방 좌익에 의해 민간인과 경찰 등이 희생되었다.

[경과]

순창 군민이 좌익과 빨치산에 의해 희생된 사건은 인민군 점령기[1950년 7월 말~10월]와 빨치산 활동기[1950년 10월 말]로 구분할 수 있다. 인민군 점령기는 기간이 짧아 희생자가 많이 발생하지 않았으나, 지방 좌익들이 마을 유지, 경찰 등 우익 인사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구타와 총살을 자행하였다. 마을별로 보면 쌍치면 용전리 1명, 유등면 오교리 2명, 팔덕면 4명, 구림면에서는 금천리 방화천 변에서 주민 최소 32명, 자양리 후덕골에서 2명이 지방 좌익에 의한 구타로 희생되었다.

1950년 10월부터 국군 제11사단이 순창군 일대에 토벌 작전을 펼치면서 빨치산 활동기에는 마을 주민들이 군경의 프락치[끄나풀, 첩자]로 오인 받거나, 국군에 협력한 향토 방위대라는 이유로 빨치산에 끌려가 희생되었다. 마을별로 복흥면 13명, 쌍치면 3명, 금과면 2명, 동계면 4명, 인계면 1명 등이 지방 좌익과 빨치산에 의해 희생되었다. 이 인원은 최소한의 숫자에 불과하다. 또한 빨치산이 보급 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강제 연행으로 인한 부상자도 발생하였다.

[결과]

인민군 점령기에 지방 좌익들은 우익 인사와 마을 유지 등을 총살하고 회문산으로 입산하였다. 1950년 10월부터 1951년 5월까지 회문산, 국사봉 일대를 거점으로 활동한 빨치산에 의해 대한 청년 단원, 마을 주민 등이 희생당하였다.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는 2009년에 순창군의 적대 세력에 의한 희생자가 대략 41명 정도라고 발표하였으나, 이는 최소한의 숫자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의의와 평가]

여순 사건 발생 이후 입산한 빨치산6·25 전쟁 이후 입산한 빨치산 등이 순창군 회문산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는데, 특히 6·25 전쟁 이후 회문산에는 빨치산 전북도당 유격대 사령부가 자리하면서 빨치산의 거점이 되었다. 이로 인하여 민간인의 희생이 많았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1.04 띄어쓰기 [정의] 7월말→7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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