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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092
한자 楊時晉妻道康金氏旌閭
이칭/별칭 양시진 처 도강 김씨 정려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평남길 107-32[평남리 435]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김승대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현 소재지 양시진 처 강진 김씨 정려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평남리 435[구남 마을]지도보기
성격 정려문
양식 겹처마 팔작지붕
정면 칸수 1칸
측면 칸수 1칸
소유자 남원 양씨 종중
관리자 순창 군수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평남리에 있는 조선 후기 양시진 처 강진[도강] 김씨의 충절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려.

[개설]

양시진의 처 강진 김씨는 1577년(선조 10) 9월 4일에 지금의 정읍시 칠보면에서 김대립(金大立)의 딸로 태어났다. 김대립은 문행(文行)으로 천거되어 선무랑(宣務郞) 사포서 별제(司圃署別提)를 지냈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의병을 일으켰다. 강진 김씨구음(龜陰) 양시진(楊時晉)[1573~1615]과 혼인하였는데, 양시진은 1605년(선조 38) 진사가 되고 이듬해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광해군 때 지평(持平)·정언(正言) 등을 지냈다. 1615년 지평으로 있을 때 신경희(申景禧) 등과 함께 능창군(綾昌君) 이전(李佺)을 추대하는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익산 출신 소명국(蘇明國)의 고발로 장형(杖刑)을 받고, 함경도 종성으로 귀양 가던 중에 세상을 떠났다. 인조반정 후 누명이 밝혀져 관직이 복구되고 이조 참의에 추증되었다.

강진 김씨는 남편 양시진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자, 3년 동안 하늘과 해를 보지 않고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고 한다. 인조반정으로 양시진의 신원이 복관되자, 「하청송(河淸頌)」을 지었다. “언제나 탁류만 흐르는 황하에 맑은 물이 흐르니 어진 임금이 나왔고, 어진 임금이 원한을 풀어 주니 온 천지가 기쁨에 넘쳤다[黃河淸 星君出 雪人寃 乾坤闊].” 이 글을 이귀인조에게 외워 올리니 왕이 매우 기뻐하였다고 한다. 39세에 3남 4녀를 두고 남편이 죽는 참화를 당하였으며, 이후 자식들을 올바르게 키우고 1650년(효종 즉위년) 74세에 세상을 떠났다.

[위치]

구음공 처 숙부인 강진 김씨 정려(龜陰公妻淑夫人道康金氏旌閭)는 순창군 적성면 평남리 435번지 섬진강 변에 있으며, 옆에는 전라북도 문화재 자료 제132호인 어은정(漁隱亭)이 있다. 어은정강진 김씨의 시아버지인 어은(漁隱) 양사형(楊士衡)이 1567년(명종 22) 동계면(東溪面) 구미리(龜尾里)에서 이곳으로 분가하여 살면서 지은 누각이다.

[변천]

강진 김씨에 대해서는 1653년(효종 3) 나라에서 정려를 내렸고, 양응수(楊應秀)[1700~1767]가 1761년(영조 37)에 정려 중수기를 써서 현재에 이른다.

[형태]

정려각은 정면 1칸, 측면 1칸이다.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조선 후기 건축 기법을 잘 보여 준다.

[현황]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남원 양씨(南原楊氏) 문중 소유이고, 관리는 순창 군청에서 한다.

[의의와 평가]

강진 김씨 정려는 순창 남원 양씨 가계의 중심인물인 양사형의 며느리 강진 김씨의 충과 정절을 기리는 정려이다. 순창군의 대표적인 정려로 상징되는 유적이다. 남편 양시진, 아버지 김대립 등은 모두 광해군 정권을 반대한 인물들로 인조가 즉위하자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이용자 의견
팩*** 정려비인데 정녀 당사자의 출신 내용이 부족한것 같아 몇자 남김니다.
정녀의 부(父) 김대립의 호(號)는 월봉(月峰)입니다.
김대립은 신라 제56대 왕인 경순왕의 22대손으로 도강김씨(강진김씨) 시조 김희조의 15대손(16세)입니다.
자료 출처 : 경주시립박물관(신라계림김씨계보도, 경주김씨족보), 한국학중앙연구원(도강김씨 대동보).
2019.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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