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29 |
---|---|
한자 | 愛國 啓蒙 運動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이행묵 |
[정의]
일제 강점기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전개된 실력 양성 운동.
[교육을 통한 계몽 운동]
부여 지역의 애국 계몽 운동은 교육 분야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조선총독부는 1911년 「조선교육령」을 반포하고 보통학교 교육을 실시하였다. 이후 부여군 내에 보통학교 12개를 설립하였으나 부여군 지역의 모든 아동이 학교교육의 혜택을 받을 수는 없었다. 문맹률이 높았을 뿐만 아니라 남녀 간의 차별도 심하였다. 빈농의 아이들은 근대적인 교육에 대한 열망을 교육 기관이 아닌 사회단체가 개설한 강습소나 야학을 통하여 채울 수밖에 없었다.
부여 지역에서는 주로 신지식을 교육받은 청년층을 중심으로 각종 신문화 운동이 전개되었다. 1920년대 초반에 설립된 부여군 지역의 대표적인 야학과 강습소는 1921년 남면 대선리에 설립된 노동야학과 1923년 양화면 입포리에 설립된 봉명의숙이다. 야학 운동이 활성화되자 부여군 지역의 청년들은 1929년 부여야학연합회를 설립하고 상호 친목과 교재 개발 등을 공동으로 진행하고자 하였다. 군내 11개 면 18개 단체에서 모두 34명의 대표가 참석하는 회합이 부여읍 쌍북리의 야학회관에서 개최되었다. 그러나 곧 이은 경찰의 탄압으로 조직적인 활동은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1930년대 들어와 세도청년농우회가 설립한 장산리야학, 소년회의 주최로 설립된 규암면의 내리야학, 남면 마정리에 설립된 야학 등은 야학 운동에 호의적이었던 지방 유지들의 후원이 중단되면서 청년 중심으로 전환되기 시작하였다. 야학이 활성화되자 조선총독부는 민중 야학을 강제로 해산하고, 1933년경부터 농촌진흥운동의 일환으로 관제 야학 혹은 진흥 야학을 설립하였다.
[청년이 주도한 계몽 운동]
애국 계몽 운동의 일부로 청년운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근대 학교교육을 통하여 신지식을 받아들인 청년들은 군면 단위로 여러 단체를 결성한 이후, 야학이나 생활 개선과 같은 민중 계몽 운동, 각종 강연회, 토론회, 연극회, 체육회 등과 같은 정치 문화 활동을 전개하였다. 1920년대 전반기에는 각종 인격 수양이나 품성 도야 운동과 농촌 계몽 운동이 애국 계몽 운동의 일환으로 진행되었다. 1920년대 중반 이후가 되면 사회주의 영향력 아래 청년운동의 성격도 변한다. 특히 혁신청년회와 같은 조직이 등장하면서 지역 사회 내에서 신간회와 농민조합 등이 결성되기 시작하였다.
부여 지역에서는 1922년 규암청년회가 처음 설립되었다. 규암청년회는 신생활을 수립하고 신문화를 촉진하여 사회 개량과 지방 발전을 도모하고자 설립되었다. 다음으로 주목되는 단체는 부여청년회이다. 부여청년회는 1926년 부여군 천도교 교구장이었던 김태현을 임시 의장으로 하여 총회를 개최하였다. 부여청년회는 조직이 매우 잘 구성되어 있어서 노동자와 농민들을 의식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부여에서는 1923년경 형평사 부여지회가 설립되어 백정들의 사회 차별을 목적으로 조직이 구성되었다. 형평사 부여지회는 보령, 결성, 한산, 강경, 입장, 군산, 청양 등지에서 모여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지방 분쟁 대책, 반동분자 처치, 일체 차별 철폐, 일반 사회문제 등을 토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