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조합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9000458
한자 農民組合 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충청남도 부여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김헌주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30년 - 농민조합 운동 준비위원회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31년 - 농민조합 결성 시도
전개 시기/일시 1931년 6월 7일 - 부여농민조합 창립대회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31년 8월 26일 - 부여농민조합 간판 총독부 경찰에 강제 철거
성격 농민 운동
관련 인물/단체 노명우|이문용

[정의]

1930년대 충청남도 부여 지역에서 농민조합을 결성하여 진행한 운동.

[역사적 배경]

1930년대 부여 지역의 농민조합 결성은 1920년대의 세계 정세 변화에서부터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그 시작은 1929년 세계 경제 대공황이었다. 대공황으로 쌀값이 폭락하면서 조선 농민의 경제는 파탄 국면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지속된 일제의 수탈과 조선인 농민들의 저항에 대한 탄압, 그리고 조선공산당의 해산으로 조선의 농촌 사회는 동요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30년대 빈농 출신 활동가들을 중심으로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이 일어나게 되었다.

[경과]

1930년대 혁명적 농민조합 운동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부여 지역에서도 농민조합이 결성되었다. 부여 지역의 농민조합 운동노명우이문용이 주도하였다. 1930년에 노명우이문용을 비롯한 20여 명은 조선일보 부여지국에서 2회에 걸쳐 농민조합 운동 준비위원회를 개최하였다. 하지만 조선총독부 경찰은 불온한 자들의 단체 조직을 허가할 수 없다는 이유로 농민조합 결성을 가로막았다. 1931년 총독부 경찰의 방해 공작 속에서도 재차 농민조합 결성을 시도하였고, 결국 1931년 6월 7일 부여농민조합 창립대회를 열게 되었다. 그러나 부여농민조합 창립대회가 시작하자마자 노명우와 장창선 등 4명이 체포되었고, 경찰은 안녕질서를 방해할 염려가 있다는 명분으로 부여농민조합 창립대회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노명우와 장창선 등의 부여 지역 운동가들은 다시 서면 대회 형식으로 부여농민조합을 창립하였고, 조합 내 조직도 구성하였다.

부여 지역의 농민조합은 타 지역의 농민조합과 비슷하게 집행위원장을 중심으로 대표의원, 서기부, 서무재정부, 선전조직부, 교편부, 조사연구부, 쟁의부, 청년부, 부인부, 소년부, 소비조합부, 검사부 등으로 조직되었다. 이렇게 조직된 부여농민조합은 다양한 대중운동을 전개하였다. 농민에게 농업 기술을 보급하기 위하여 공동 경작지를 설치하였고, 퇴비 생산을 위한 공동 퇴적장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결과]

부여 지역 농민조합 운동은 시작과 함께 총독부 경찰의 방해에 가로막혔다. 경찰은 동아일보사 부여지국에 임시로 설치한 ‘부여농민조합’ 간판을 2주일 내로 철거하라고 명령을 내렸고, 결국 1931년 8월 26일 경찰에 의하여 부여농민조합 간판이 강제로 철거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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