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9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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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盧命愚 |
영어공식명칭 | Noh Myeongu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김민석 |
출생 시기/일시 | 1915년 5월 6일 - 노명우(盧命愚)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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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931년 1월 15일 - 노명우 금강문인회 조직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31년 10월 - 노명우 공산주의연구협의회 조직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5월 - 노명우 비밀 결사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 조직 주도 |
활동 시기/일시 | 1933년 9월 - 노명우 일제 경찰에게 체포 |
활동 시기/일시 | 1935년 11월 25일 - 노명우 공주지방법원에서 집행유예 5년형 언도 |
몰년 시기/일시 | 1972년 10월 10일 - 노명우(盧命愚)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90년 - 노명우(盧命愚) 건국훈장 애족장 수훈 |
출생지 | 합송리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 |
활동지 | 부여 - 충청남도 부여군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성 |
[정의]
충청남도 부여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노명우(盧命愚)[1915~1972]는 1915년 5월 6일 태어났다. 본적은 부여군 규암면 합송리이다. 1931년 1월 15일 홍산면에서 유기섭(柳基燮)·장창선(張昌善)·오기영(吳祺泳)·이원인(李原人) 등 19명과 함께 금강문인회(錦江文人會)를 조직하였다. 1931년 봄 이호철(李戶喆)·장창선(張昌善)·유기섭·오기영 등과 함께 농민 조합 조직에 착수하였으나 일제 경찰의 취체가 심하여 중단하였다. 이후 전영철(田泳哲)·강도형(姜道馨) 등과 부여군 내의 마정리·금송리·조현리·장하리·중정리 등 마을에 야학을 개설하여 농민층과 청소년들에게 초등교육을 실시하고 사회주의 사상과 항일 독립 의식을 고취하는 데 힘썼다.
금강문인회 회원들은 1931년 10월 구룡면 금사리에서 회합하여 공산주의연구협의회로 전환하였는데 당시 노명우는 서기로 선임되었다. 1933년 3월에는 공산주의연구협의회를 발전적으로 해소하고 공산주의자협의회를 결성하여 부여군 내 농민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보급하는 데 주력하였다. 1933년 4월 기존의 홍산노동조합을 적색 노조로 개편하였고, 5월에는 비밀 결사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를 조직하고 이호철·오기영·전영철·유병철(柳秉哲)·유인철(柳寅喆)·최재봉(崔在鳳) 등을 각 지부의 책임자로 삼아 조직 확대에 힘썼다.
노명우 등은 1933년 7월 청년들을 규합하여 부여농민구락부연합회의 대외 위장 지부로서 대야구락부를 조직하고 항일 농민 운동에 힘쓰던 중 1933년 9월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었다. 노명우는 체포된 뒤 2년 동안의 예심을 거쳐 1935년 11월 25일 공주지방법원에서 집행유예 5년형을 선고받고 출옥하였다. 노명우는 1972년 10월 10일 사망하였다.
[상훈과 추모]
대한민국 정부는 노명우의 공적을 기려 1982년 대통령 표창,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