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90176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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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槿泰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인물(일반)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임나영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를 지역구로 활동했던 정치인이자 민주화 운동가.
[가계]
김근태(金槿泰)는 1947년 2월 14일 경기도 부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이고, 소설가 김국태(金國泰)가 그의 형이다. 재야 민주화 운동을 함께 했던 인재근(印在謹)과 결혼하여 1남 1녀를 두었다. 그가 별세하고 부인 인재근이 2012년 제19대 총선에서 그의 지역구인 도봉 갑구에서 국회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활동 사항]
김근태는 경기도 양평군 양주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해서 서울 광신 중학교와 경기 고등학교를 다녔다. 1962년에 서울 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학생 운동을 시작하였다. 대학 재학 당시, 제6대 대통령 선거 부정을 규탄하는 시위를 주도하다가 제적을 당하고 강제로 군대에 입대하였다. 제대하고 복학한 뒤, 1971년에는 서울 대학교 내란 음모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를 당하였고, 1972년에 졸업하였다. 1974년에는 긴급 조치 9호 위반으로 다시 수배되어, 박정희 정권이 끝날 때까지 수배자 생활을 하였다. 수배 중이던 1977년, 당시 인천 부평의 봉제 공장에서 위장취업을 하고 있던 인재근과 결혼하였다.
1980년대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에도 재야 민주화 운동을 지속하였다. 1983년에는 민주화 운동 청년 연합[민청련]을 결성하여 초대 의장을 맡았고, 1988년에는 전국 민족 민주 운동 연합[전민련]에 가담하여 정책 기획실장과 집행 위원장 등을 역임하였다. 이 과정에서 투옥되어 모진 고문을 당하기도 하였다. 1987년에는 아내 인재근과 함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였다. 1990년에는 여당인 민주 정의당과 야당인 통일 민주당, 신민주 공화당이 3당 합당을 결행하자 전국 민족 민주 운동 연합을 중심으로 이를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때 김근태는 국가 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어 다시 2년 3개월 동안 복역하였다.
1995년, 당시 김대중이 이끌던 새 정치 국민 회의 창당에 참여하여 부총재를 맡으면서 처음으로 제도권 정치에 진입하였다. 이듬해인 1996년 제15대 총선에서 서울 도봉 갑선거구[쌍문 1동, 쌍문 3동, 창 1동, 창 2동, 창 3동, 창 4동, 창 5동]의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하여 38.9%의 득표율로 당선되었다. 이후 2000년 제16대 총선에서도 새 천년 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50.9%, 2004년 제17대 총선에서는 열린 우리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52.1%의 득표율로 내리 3선에 성공하였다.
2002년 제16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는 당시 민주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출마하였으나 중도에 사퇴하였다. 노무현 정부가 출범한 뒤에는 2004년 7월부터 2005년 12월까지 보건 복지부 장관을 지냈고, 2006년 6월부터 2007년 2월까지는 여당인 열린 우리당의 의장을 역임하였다.
2008년에는 제18대 국회 의원 선거에 역시 도봉 갑 지역구 의원으로 출마하였으나 46.2%의 지지율로 낙선하였다. 이후 통합 민주당 상임 고문과 민주 통합당 상임 고문을 지냈다. 2007년 파킨슨 병 확진을 받았으며, 2011년 12월 30일 뇌정맥 혈전증으로 치료를 받다가 합병증이 겹쳐 패혈증으로 사망하였다.
[저술 및 작품]
저서로는 고문의 진상을 폭로한 『남영동』[1988], 옥중 서간집 『열린 세상으로 통하는 가냘픈 통로에서』[1992], 사회 비평집 『희망의 근거』[1995], 에세이집 『우리 가는 이 길은』[1992], 『희망은 힘이 세다』[2001], 『두껍아 두껍아 헌 집 줄게, 새 집 다오』[2004] 등이 있다.
[묘소]
경기도 남양주시 화도읍 월산리 마석 모란 공원에 안장되었다.
[상훈과 추모]
김근태는 1987년 부인 인재근과 함께 로버트 케네디 인권상을 수상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