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3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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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沓洞里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곽현옥 |
개설 시기/일시 | 1914년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 개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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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리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답동리 |
성격 | 법정리 |
면적 | 4.28㎢ |
가구수 | 89가구 |
인구[남/여] | 177명[남 87명/여 90명] |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답동리에 속하는 마을 중 비석거리는 마을 주변에 공적비가 많아 붙여졌다. 지금은 비석 하나만 남아 있다. 농곡 마을은 논이 많은 골짜기라는 의미로 논골, 농곡 등으로 불렀다. 그 후 변음이 되어 농골이라고 하였는데, 한자로 표기하면서 농곡(農谷)이 되었다.
[형성 및 변천]
답동리 지역은 삼한 시대 마한 땅이었으며, 백제 때는 복흥현(福興縣)으로 불렸다. 1314년(고려 충숙왕 1) 복흥방(福興坊)이 되었다가 1897년(고종 34) 방을 면으로 개칭하였다. 고려 시대 밀양 박씨(密陽朴氏)가 처음 터를 잡고 마을을 이루었다고 전한다. 처음 원답동이었다가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구산(龜山) 마을, 신기 마을을 병합하여 법정리인 답동리가 되었다.
1971년 행정리 조정으로 농곡 마을, 구산 마을, 신기 마을, 비석거리 등으로 분리되었다. 농곡 마을은 천치(天峙), 즉 하늘재[390.6m]에서 산맥이 동쪽으로 내려오다가 북쪽으로 돌아 다시 동북쪽으로 조그마한 산을 만들고, 그 산의 서남쪽 골짜기에 마을이 이루어진 곳이 농곡이다. 원래 상치등면(上置等面)에 속하였던 지역으로 안동 권씨(安東權氏), 경주 정씨(慶州鄭氏)가 이주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신기 마을은 조선 시대인 1800여 년경 김해 김씨 김용상(金龍祥)의 증손 김제종(金濟宗)이 이웃 마을보다 뒤늦게 터를 잡아 7~8호가 살면서 ‘새 터’라 불렀으며, 6·25 전쟁 후 천치 주민이 대거 전입하며 43가구로 형성되었다.
[자연 환경]
답동리는 복흥면 정동쪽에 위치한다. 구산 마을은 전라남도와 마을의 경계를 이루는 산맥이 정북으로 내려와 답동리와 복흥면 소재지로 통하는 도로변에서 개장되어 형성되었다. 신기 마을은 옛 삼방 지역인 복흥면의 동쪽 6㎞ 거리에 있으며, 호남정맥으로 전라남도와 경계를 이룬다. 천령산[수리봉] 북쪽으로 내려 솟은 날개봉에서 북으로 내린 산자락 끝에 마을이 위치하고 있다. 마을 앞에서 보이는 답동들과 하리들 가운데로 삼방천이 흐르고, 백방산 투구봉과 옥녀봉, 추월산 및 담양에서 정읍으로 통하는 지방도 등으로 사계절 아름다운 경관을 볼 수 있다.
[현황]
2021년 12월 현재 답동리 면적은 약 4.28㎢이며, 인구는 89가구, 177명으로 남자가 87명, 여자가 90명이다. 4개 행정리와 5개 자연 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2000년 삼방정(三坊亭)과 2002년 6월 6일 신기 마을 회관[복흥면 답동2길 15-9]이 신축되었다. 마을에는 답동 진료소가 있어 마을 주민을 비롯해 가까운 마을에 거주하는 주민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농가 대부분이 복분자, 오디, 오미자, 고추, 배추 등 다양한 소득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대부분 일반 농경지에는 벼농사와 특용 작물로 블루베리 등을 재배한다. 국도 29호선과 지방도 792호선이 만나는 곳으로, 천치를 넘어 담양군 용면으로 가는 길과 복흥면 소재지로 가는 길, 쌍치면으로 가는 길이 나누어진다. 또한 하리 마을, 사창 마을로 가는 길도 이곳에서 시작되는 등 도로가 잘 발달하였다. 답동 초등학교가 있었으나 폐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