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61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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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運動 |
이칭/별칭 | 삼일 운동,3·1 만세 운동,기미 만세 운동,만세 운동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숙정 |
발단 시기/일시 | 1919년 3월 1일 - 서울 태화관에서 「독립 선언서」 낭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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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시기/일시 | 1919년 3월 15일 - 박동진 독립운동 관련 문서 작성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3월 20일 - 천도교도 중심으로 만세 운동 전개 |
전개 시기/일시 | 1919년 4월 24일 - 박동진 독립운동 관련 문서 2차 작성 |
종결 시기/일시 | 1919년 4월 - 박동진 등 징역형 선고 |
발생|시작 장소 | 순창군청, 순창 헌병 분견소 및 순창 학교 - 전라북도 순창군 |
종결 장소 | 순창면사무소 - 전라북도 순창군 |
성격 | 항일 운동|독립운동|만세 운동 |
관련 인물/단체 | 박동진|조선 독립단|천도교|정홍모|우치홍|문명근 |
[정의]
1919년 3월 15일부터 약 1개월 동안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전개된 민중 봉기.
[개설]
1909년 남한 대토벌 작전 이후 대한 제국인들은 일본의 강력한 무력 통치 앞에 10여 년을 숨죽인 채 살아왔다. 1919년 1월 21일 서거한 광무 황제[고종]에 대한 독살설과 각 계층의 민족 대표들의 참여로 전국적으로 일어난 민중 봉기가 3·1 운동이다. 서울에서 시작되어 전국 12개 부(府)와 220개 군(郡)에서 일어났으며 평화적인 만세 운동 또는 적극적인 독립 전쟁과 같은 양상으로 다양하게 확산되었다. 조선 총독부의 공식 집계에 따르면, 106만 명이 참가하여 진압 과정에서 553명이 사망하고 1만 2000명이 체포되었다.
[역사적 배경]
1910년 8월 29일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긴 후 우리 민족은 무단 통치라는 이름 아래 자유를 박탈당하고 핍박을 받는 생활이 이어졌다. 특히 1912~1918년에 이루어진 토지 조사 사업으로 많은 농민들이 땅을 빼앗기게 되자 분노는 극에 달하였다. 마침내 1919년 3월 1일 서울 태화관에서 33인의 민족 지도자들이 「독립 선언서」를 낭독하고 시위가 전국적으로 퍼져나가게 되었다.
[경과]
전라북도 순창에서의 3·1 운동은 박동진(朴東鎭)의 주도로 이루어졌다. 박동진은 1919년 3월 15일 밤 자택에서 ‘조선 독립단 만세’, ‘조선 독립단 독립 만세’ 등의 문서 3통을 작성하고, 3월 17일 오후 1시경 순창군청, 순창 헌병 분견소 및 순창 학교 앞 게시판에 붙여 전국에서 민중 봉기가 일어났음을 알렸다. 3월 20일 밤에는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순창군민 200여 명이 순창읍 뒷산에 모여 태극기를 흔들며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때 노병화(盧炳華) 등 10여 명의 천도교인들은 적의 고문에도 굽히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4월 11일 장날 아침에는 또 “독립 만만세! 오늘 11일 독립 만세를 부를 것이니 모두 모이라 만약 헌병이 출동할 때에는 모두 죽여라!”는 내용의 격문이 붙었기에 일본은 증파되어 오는 보병대 일부를 순창읍에 배치하였다.
이후 박동진이 4월 24일 자택에서 “1919년 4월 26일 순창 장날에 순창 군민은 20세부터 50세까지 전부 집합하여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독립 만세를 외치자. 만일 만세를 부르다가 죽더라도 이후 우리들 외의 독립을 계획한 사람들이 많이 있으니 열심히 안심하고 만세를 부르자”라는 내용을 쓴 종이 한 장과 “1919년 4월 26일은 독립 만세를 부르자. 조선인을 죽이려면 죽여라. 독립 만세를 부를 사람은 51명이나 이들을 죽여도 대신할 165명이 있으니 51명을 죽여도 아무 소용없다. 또한 우리들이 죽어도 마침내 독립을 도모할 자가 5,000만 명이 있으니 죽일 터이면 죽여라”는 내용을 쓴 종이 한 장을 작성하였다. 4월 25일 오전 1시경 전자는 순창면사무소 게시판에, 후자는 게시판 부근 돌담에 붙여 사람들을 독려하였다. 이때 본적이 순창인 정흥모(鄭鴻謨)는 남원에서 독립 정신을 고취하는 노래를 전파하였다.
우치홍(禹致洪) 역시 순창 출신으로 서울 보성 고등 보통 학교 재학 중 탑골 공원에서 일어난 3·1 운동을 목격하고 3월 7일 천도교 총부(總部)에서 「독립 선언서」 200장과 『독립신문』 150장을 가지고 귀향길에 올랐다. 이리역에서 내려 도보로 전주(全州)·진산(珍山)·무주(茂朱)·진안(鎭安)·임실(任實) 등 군의 각지를 역방하면서 천도교구실 혹은 지사들의 집을 찾아 순창으로 들어오던 중 인계면(仁溪面) 쌍암리(雙岩里) 거릿집에서 미행하여 온 헌병에게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또한 문명근(文明根)은 “관리는 이번에 동맹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조선 독립을 위해 운동을 해야 한다”는 내용의 문서를 순창 군수 앞으로 보냈다.
[결과]
박동진은 만세 운동이 사전에 발각되어 징역 1년형에 처해졌고, 정흥모는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났으며 우치홍은 판결문을 찾을 수 없다. 문명근은 징역 6월에 처해졌다.
[의의와 평가]
전라북도 지방의 만세 운동은 3월에서 4월에 집중되었으며 5월부터 소강 국면에 접어들게 되었는데 이는 순창도 마찬가지였다. 전라북도 지방의 만세 운동은 기독교계와 천도교계의 역할이 컸는데 순창은 천도교계와 연관이 있다. 즉 서울 중앙 총부에서 전달된 「독립 선언서」와 3·1 운동 소식이 천도교인들에 의해 전라북도 지역에 확산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