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10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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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張在伯 |
이칭/별칭 | 장자백(張子伯) |
분야 | 문화·교육/문화·예술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황미연 |
[정의]
개항기 순창 출신의 판소리 명창.
[개설]
『조선 창극사(朝鮮唱劇史)』에 의하면 장재백(張在伯)[?~1907]은 전라북도 순창군 출생의 철종과 고종 양대 간 인물로, 김세종(金世宗)의 직계 문인으로서 동편제의 본령을 계승한 명창이다. 동배(同輩) 정창업(丁昌業)·김창록(金昌祿)과 함께 한 시대를 울렸다고 한다. 일명 장자백(張子伯)으로도 알려졌지만 최근 학계에 보고된 것을 보면 본명은 장재백이다. 호적 또한 발굴되었는데 주소가 전라북도 남원군 왕치면 월락리 2통 9호 464번지로, 호주는 장대일(張大一), 본관은 흥덕(興德)으로 확인되었다. 그러나 전통 음악계에서는 장재백이 순창에서 태어나 남원으로 이주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론하고 있다.
장재백은 풍모가 뛰어난 미남자로 유명하였으며, 처 또한 미인이었다고 한다. 처음에 소리 공부를 할 때에는 별로 잘하지 못하여 늘 남에게 뒤쳐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남편이 명창으로 대성하기는 틀렸다고 생각한 그의 처는 몰래 집을 나가 전라북도 옥구의 어느 부잣집 첩이 되고 말았다. 아내에게 배신을 당한 장재백은 처음에는 자살하려고까지 하였으나, 비장한 각오로 학습에 정진하여 마침내 자타가 공인하는 명창의 반열에 올라섰다. 그러던 어느 날 옥구의 어느 집에 초대를 받아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도망간 아내를 만났다고 한다. 전처는 장재백의 소리를 듣고 감동하여 울면서 재결합하기를 간청하였으나, 장재백은 끝내 거절하였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명창의 반열에 오른 장재백은 이름을 날리고 벼슬까지 받게 되면서 전라도를 대표하는 소리꾼으로 부상하였으며, 이를 배경으로 판소리 가문과 혼인을 통해 혈연관계를 맺으면서 국악 명가로 부각되었다. 장재백의 중요한 혈연관계를 보면 훌륭한 국악 명가임을 알 수 있다. 장재백의 누이 장주이는 동편제의 거장이었던 유성준(劉成俊)의 처이다. 유성준의 여동생 아들인 판소리 명창 김정문(金正文)의 처 장봉선은 장재백의 막내 동생인 장봉순의 손녀다. 또 장봉선의 언니 장봉임은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성운선(成雲仙)의 어머니이며, 장재백의 동생의 아들인 장득진은 이화중선(李花中仙)의 남편으로, 순창군 적성면에서 이화중선을 지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을 통해 장재백의 가계가 순창군과 남원시 일원의 판소리 명창들과 혈연으로 이어지면서 이 지역의 판소리를 면면히 이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장재백을 설명할 때 중요한 점은 똑같은 명창이라도 경향을 통하여 세상에 널리 이름을 떨친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한정된 지방에서 명창으로 소문이 났지만 널리 알려지지 못한 사람이 있다는 것이다. 전자의 명창은 뛰어난 기예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예술과 행적이 비교적 자세히 전해지고 있지만, 후자의 경우는 이름만이 전할 뿐 행적에 대해서는 별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후자에 속하는 장재백은 판소리 연구의 필독서인 『조선 창극사』에 비록 소개되었지만, 아직도 재조명을 기다리는 명창이기도 하다.
[활동 사항]
장재백은 1887년(고종 24) 무과에 급제하여 교지를 받았고, 1887년 12월에 받은 홍패에는 어변 군관(御邊軍官) 장기성(張基成) 무과 병과(武科兵科) 제2593인 급제 출신자라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서 그가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소리꾼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장재백은 김세종 명창의 맥을 이어 청미하고 풍부한 성음과 뛰어난 기예로 「변강쇠 타령」, 「춘향가」 등을 순창 적성 매미터에서 득음하였다. 따라서 장재백의 판소리는 순창을 중심으로 다듬어지고 완성도를 높여 나갔으며, 매미터는 장재백의 소리 득음지가 되었다. 장재백은 말년까지 판소리 판에 서는 열정을 보여 주기도 하였다. 1902년에 원각사(圓覺社)에서 고종 어극 40주년 경축 행사에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이동백(李東伯)·강용환(姜龍煥)·김채만(金采萬)·유공렬(柳公烈)·염덕준(廉德俊)·송옥봉·유성준(劉成俊)·한경석(韓景錫)·허금파(許錦坡)·강소향 등 당대 쟁쟁한 명창들과 합동 공연을 하기도 하였다
[저술 및 작품]
장재백은 김세종의 소리를 계승하여 「변강쇠 타령」과 「춘향가」를 잘하였으며, 그의 더늠으로는 「춘향가」 중 ‘이 도령이 광한루에서 사면 경치를 감상하는 대목’이 전하고 있다. 이 대목은 우조(羽調) 중에서도 정악의 가곡성을 닮은 가곡성 우조라는 독특한 창법으로 되어 있다. 가곡성 우조는 정악의 음악적 특성을 판소리에 도입한 통로로 개발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 만큼 가곡성 우조로 부르는 대목의 더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장재백이 민속악이었던 판소리에 정악의 음악적 자산을 도입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는 증표가 된다. 한학에 조예가 깊어 지식을 겸비한 소리꾼 장재백이 판소리에 가곡성을 새롭게 이입한 것은 자신의 예술 세계를 보다 확장하고 발전시킨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동편제의 위대한 명창 장재백은 추천목[판소리 가락의 특징과 관련된 악조의 하나]으로 하는 소리가 장기라고 전한다. 추천목은 「춘향가」 ‘그네 뛰는 대목’ 중 “광풍에 놀란 원앙이 입도 젖도 물어 보고 우선 호우로 노는 양”을 하는 대목을 부르는 소리로, 그의 이런 특기는 후대에도 이어졌다.
[묘소]
전라북도 남원시 주생면 내동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장재백에 대한 기록이 『남원지』에 소개되어 있다. 내용을 살펴보면 장재백은 전국 팔도 명창 대회의 전라도 대표로 참가하여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되었는데, 고종과 명성황후가 “네가 최고의 명창이다.”라고 하며 “너의 소원이 무엇이냐?”라고 물었다고 한다. 이때 장재백은 “우리 쟁인들은 죽어서도 봉분을 짓지 못하므로 이를 시정하도록 전국에 명을 내려 주옵소서.” 하여 그날부터 봉분을 지을 수 있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이는 장재백이 소리꾼들의 신분을 천민에서 평민으로 해방시키는 중대한 역할을 한 사람으로 볼 수 있으며, 이에 용기를 얻은 많은 소리꾼들이 활발하게 활동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특히 장재백은 동시대의 다른 명창들과 달리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임금이 내린 그의 교지를 보면 본인뿐만 아니라 그의 할아버지와 아버지까지도 벼슬을 받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