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59000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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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淳唱-東便制-胎-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순창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근대/일제 강점기,현대/현대 |
집필자 | 황미연 |
[개설]
호남을 대표하는 호남정맥의 줄기에 위치한 순창군은 대부분이 산간지로 서쪽으로 회문산, 북쪽으로 강천산이 자리하고 있으며, 동쪽과 남쪽으로는 섬진강과 적성강 등 크고 작은 하천이 흘러 비옥한 농토가 펼쳐져 있다.
이러한 순창 지역은 판소리사에서도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간직한 고장이다. 판소리를 동편제(東便制), 서편제(西便制)로 구분하는 기준이 섬진강인데, 순창은 바로 이 섬진강 상류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 하마 마을에서 출생한 박유전(朴裕全)[1835~1906] 명창은 서편제의 창시자이고, 적성면 운림리 매미터 출신 장재백(張在伯)[1849~1906], 금과면 연화리 삿갓데 출신 장판개(張判盖)[1885~1937], 동계면 가작리 쑥대미 출신 김세종(金世宗)[1825~1898] 명창 등은 동편제의 명창이다. 이를 보더라도 순창은 판소리 발상지라 아니할 수 없다.
지금은 남원을 동편제의 본향으로 지칭하고 있지만 동편제의 좌장은 순창이라고 일컬어도 과언이 아니다. 특히 현대 판소리를 이끌어 가고 있는 서편제의 ‘보성 소리’의 굳건한 소리 맥이 순창에서 뿌리를 내렸기 때문이다. 따라서 순창은 동편제의 탯자리이자, 서편제의 본향으로 우리나라 판소리사에 있어 중요한 지역으로 주목된다.
[기록으로 본 순창의 전통 음악사]
순창은 전통 음악사에서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못한 곳이지만 전통 예술이 만개한 지역으로 『연금록(宴襟錄)』, 『호남 읍지(湖南邑誌)』, 『옥천 군지(玉川郡誌)』 등에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먼저 1859년(철종 10) 9월 13일 호남의 풍류 호사와 절대 가인들이 연유계(宴遊禊)를 조직하고 기록한 『연금록』에는 당대 전통문화를 주도했던 전라도 기녀의 활동 기록을 담고 있는데 순창 7명, 담양 7명, 남원 1명, 전주 1명의 기녀가 등장한다. 이처럼 동 시대 순창 출신의 기녀들은 전통문화의 중심부에서 활동하며 타 지역보다 양과 질적 면에서 우수한 예술성을 발휘하였다.
그리고 조선 후기 노래와 춤, 악기를 익힌 기생들의 활동도 순창의 전통 예술을 풍성하게 해줬다. 『호남 읍지』에는 전라북도에서 악(樂)·가(歌)·무(舞)를 관장했던 기관으로 교방을 소개하고 있는데, 전라북도에서는 전주부·무주부·순창군 등에서만 교방이 설치되어 악·가·무를 주도해 나갔다. 또한 『옥천군지』에는 교방의 존재와 악공이 존재한 것을 기록하고 있어 순창의 전통 예술이 과거로부터 뿌리가 깊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 행정 체제가 부(府)·목(牧)·군(郡)·현(縣)으로 설치된 점을 감안한다면 소규모 군에서 이처럼 풍성한 전통 예술이 있었던 것은 그만큼 문화적 토양이 굳건하였음을 말해준다 할 수 있다.
순창 판소리 문화의 위대성은 전라 감영에서 그 빛을 발한다. 현재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돼 있는 「연수전중용하기(宴需錢中用下記)」에는 당대 최고의 명창으로 이날치(李捺致)[1820~1892], 김세종, 장재백 등이 등장한다. 「연수전중용하기」는 전라 감영에서 작성한 관용 문서로서, 1885년(고종 22) 전라 감영에서 잔치를 하고 지출한 내역을 기록한 금전 출납에 관한 내역을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전라 감영이 베푼 소리판에 초대된 명창 3명 가운데 2명이 순창 출신이란 점은 순창이 당대 판소리 문화에 끼쳤던 영향력이 얼마인지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사료가 된다.
[순창이 낳은 명창]
현대 판소리사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선보이고 있는 보성 소리의 뿌리뿐만 아니라 보성 소리의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토양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순창은 후기 8명창에 속하는 박유전, 김세종, 장재백 등을 배출한 곳이다. 조선 후기 판소리를 선도해 나갔던 8명창 중 3명이 순창 출신이란 점은 순창이 판소리의 본향이란 것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후기 8명창 시대는 전기 8명창들이 개발해 놓은 다양한 선율과 사설을 더욱 갈고 닦아 이론과 실제 면에서 판소리의 완성을 보던 시기란 점에서 조선 후기 순창 출신 명창들의 득음을 향한 시대정신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
일제 강점기에 장판개는 순창의 판소리 명창으로 각인되었으며, 20세기 이후에는 장영찬(張泳瓚)[1930~1976], 성운선(成雲仙), 박복남(朴福男)[1927~2004] 등이 순창의 판소리 맥을 전승한 바 있다. 그리고 순창 판소리와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고 있는 인물이 바로 이화중선(李花中仙)[1898~1943]이다. 이화중선은 경상남도 동래에서 태어나 전라남도 벌교로 이사한 후 한때 남원에서 살게 되었다. 이후 순창군 적성면 임동에서 장득주(張得周)[장재백의 조카]의 첩으로 호적에 올랐으며, 이곳에서 장득주에게 소리를 배운 것으로 나타난다.
1. 박유전
박유전은 대원군으로부터 무과 선달의 직첩뿐만 아니라 색안경인 오수경과 황금 토시까지 받았던 명창이다. 박유전은 현재의 보성 소리인 강산제의 기초를 쌓았으며, 「새타령」과 「적벽가」, 「심청가」 등에 특장이 있었다. 박유전은 호를 강산이라고 했는데, 이 또한 대원군이 박유전의 소리를 듣고 “네가 제일강산이다.” 즉, 천하에서 제일이라고 칭찬을 한 말에서 유래됐다고도 한다.
2. 김세종
김세종은 신재효(申在孝)[1812~1884]에게 지침을 받고 이론과 실기를 겸비하였으며, 이른바 김세종 바디 「춘향가」를 탄생시킨 주인공으로 보성 소리의 토대를 쌓은 명창이었다.
3. 장재백
장재백은 1887년(고종 24) 무과에 급제하여 교지를 받았으며, 김세종의 소리를 이어받아 「변강쇠 타령」과 「춘향가」를 잘했던 명창으로 손꼽힌다. 전통 음악 명가의 후손인 장재백은 빼어난 용모와 탄탄한 음성을 가진 소리꾼으로 시대를 초월한 예술성을 전개하였다. 특히 장재백은 정악의 가곡성을 민속악이었던 판소리에 이입하여 판소리의 외형을 넓힌 인물로 높이 평가된다. 현재 그의 더늠으로 「춘향가」 중 ‘적성가’가 전해지고 있다.
4. 장판개
근대 5명창 시대의 맥을 잇고 있는 장판개는 고종으로부터 혜릉 참봉을 제수 받은 어전 광대이다. 현재 기록이 남아 있지 않지만 장판개의 할아버지와 아버지 역시 음률의 명인이며, 판소리의 명창으로 참봉직을 제수 받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장판개는 명창이자 명고수였으며, 거문고·대금·피리 등에도 정통하여 각기 일가를 이룬 인물이다.
정판개의 성음은 청미함은 말할 것도 없으며, 최하의 저음에서 최상의 고음까지 자유자재로 구사하는 기예의 뛰어남은 가왕 송흥록 이후 독보적이라는 평이다. 정판개는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으며, 「흥보가」 중 ‘제비 노정기’와 「적벽가」 중 ‘장판교 대전하는 대목’은 일품이었다고 전한다. 특히 ‘제비 노정기’는 그의 더늠으로 현재까지도 유명하다.
장판개의 예술적인 맥은 아들 장영찬과 조카 장월중선(張月中仙)[1925~1998]으로 이어졌다. 장월중선에 의해 전수된 그의 「수궁가」는 아직도 정순임에 의해 불리고 있다. 4대에 걸친 판소리 명문이 탄생한 것이고, 이렇듯 장판개의 가계는 대대로 예술가 집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장영찬
장영찬은 순창 판소리사에서 간과해서는 안 되는 인물이다. 장영찬은 장판개의 둘째 아들이며, 본명은 장도익이다. 장영찬은 13살 때 조상선(趙相鮮)[1909~1983]에게 단가를 배우기 시작한 이래 박록주(朴綠珠)[1905~1976]에게 「흥보가」를, 임방울(林芳蔚)[1904~1961]에게 「적벽가」와 「수궁가」를, 김여란(金如蘭)[1907~1983]에게 「춘향가」를, 정응민(鄭應珉)[1894~1961]에게 「심청가」를 차례대로 배웠다. 장영찬은 판소리에 뛰어난 예술성으로 눈길을 끌었지만 당뇨병으로 요절한 관계로 그 예술혼을 모두 전개하지 못하였다. 제자로는 조영숙, 안행련, 김동애, 김일구 등을 두었다.
6. 박복남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2-12호 「수궁가」 보유자였던 박복남은 순창이 낳은 현대 판소리 명창으로서, 불우한 가정 환경으로 70세에 이르러 무형 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한이 많은 명창이었다. 오직 소리판을 천직으로 삼았던 그는 박삼룡, 주광덕(朱光德), 이동백(李東伯)[1866~1950] 등에게 사사하였으며, 1996년 서울 전국 명창 경연 대회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바 있다.
[순창은 판소리의 요람]
19세기 들어 판소리는 전성기를 누리며 대중적인 사랑을 받게 되었다. 19세기를 통틀어 판소리사에서는 8명창 시대라고 불리는데, 19세기 전반을 전기 8명창 시대로, 후반을 후기 8명창 시대로 각각 구분하여 지칭하고 있다. 19세기의 판소리는 다양하게 발전한 결과 동편제·서편제·중고제(中高制) 등의 세 가지 유파로 정립되었다. 이 과정에서 순창의 판소리 명창들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박유전과 김세종 등은 후기 8명창 시대의 한복판에서 치열한 예술혼을 불태웠고, 이를 통해 당당한 예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순창은 판소리의 양대 유파인 동편제 소리와 서편제 소리가 발생한 유서가 깊은 고장이다. 19세기 말까지는 순창의 소리가 일정 부분 전승되었지만, 20세기 이후에는 순창에서 발생했던 소리들이 순창에서는 제대로 전승되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지역적으로 순창이 판소리의 생산지였지만 소비지가 아니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전통 시대에는 그래도 좀 나았지만 도시화가 촉진되면서 문화 활동이 도시 중심으로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판소리가 농촌을 떠나게 되는 도시 가속화 현상이 순창에서도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순창에서 발생했던 소리가 현대에 와서 가장 강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는 보성 소리로 남아 있는 것은, 순창에서 발생한 판소리의 우수성을 입증해 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순창 판소리의 위대한 명성을 찾고 조선 후기 8명창, 일제 강점기 근대 5명창, 무형 문화재 도입 이후 왕성한 활동을 전개했던 순창의 판소리 명성을 되찾는 일이 이제 순창의 과제로 남아 있다.